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경인 Oct 21. 2020

10월의 안개

- 노래 2


  오랫동안 내 십팔 번은 정훈희의 < 안개>였다.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  


내가 좋아한 가사  ‘안갯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로 끝나는 구절을 내게 각인시키기 위해 2절까지 불러야 했다. 더 이상 의지로 삶을 밀고 나갈 기력이 없어지고 그저 무탈한 하루에 감사하게 될 즈음 정훈희 안개는 내게서 가뭇없이 사라졌다. 이 노래는 김승옥 단편 “무진기행”을 영화로 만들 때, 각색에 참여한 작가가 직접 노랫말을 썼다고 한다.

  시대를 쥐락펴락 했던 ‘ 감수성의 혁명김승옥 문학이 이십  내게도 각별했던 것은  속의 시각 이미지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때  머리로 그의 < 1964 겨울>이나 <서울의 달빛 0> 같은 글을  이해하지는 못했으니까. 젊어서는 좋았던 헤르만 헤세의 안개 시는 삽십 줄에 들면서 시들해졌다. 삶의 여정은 안개 정도가 아니어서.


                     안갯속에서
            

                  - 헤르만 헤세 (독일 1877-1962)
 
          안갯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

          숲이며 돌은 저마다 외로움에 잠기고

          나무도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다 혼자다.
 

          나의 인생이 아직 밝던 시절엔

          세상은 친구들로 가득했건만

          이제는 안개가 내리어

          보이는 사람 하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조용히 모든 것에서

          사람을 떼어놓는 그 어둠을

          조금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현명하다 할 수는 없다


          안갯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
 
          인생이란 고독한 것

          사람들은 서로 모르고 산다.

          모두가 혼자인 것이다.


 헤세는 노년에 이 시를 썼지만 내가 아는 모든 헤세의 시는  청년의 노래다.

 안개 하면 기형도 시인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안개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내 가슴에 있다. 이 시대 숱한 젊은이들의 좌절과 아픔 속에는 내 자식도  있으니까.


                         안개

1.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갯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들어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 나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겨울엔
방죽 위에서 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銃身을 겨눈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를 공장으로 간다.
        

                         - 기형도 <안개 > 전문

  내가 사는 곳도 가끔 아침 안개가 시야를 지워버릴 때가 있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다. 가을은 깊어가고, 큰딸은 자격증 시험 보러 가고, 작은 딸은 산티아고 길 300킬로 걸었다고 지도 표시해서 텔레그램으로 전하고 ( 배꼽티 하루 입었다 감기 걸렸다는 소식도 함께) 명퇴한 남편은 다시 돈 벌러 가고 , 나는 무화과 빵 한쪽에 아보카도 반 개 얹어서 커피에 먹고 서운해서 미역국에 연시 하나 추가로 먹으며 계절을 실감한다.

  

 세상을 살포시 덮어버린 안개를 베란다에 서서 보며  기형도의 시와 1980년대 김혜자 정동환 주연의 “만추”를 같이 본 , 옥반지를 만들어 내민 직장동료 남자를 잠깐 생각했다. 조회해 보니 만추가 개봉되었던 해가 1981년이다. 그 사람이 생각나는 건 무거웠던 내 이십 대를 알싸하게 만들어준 고마움 때문. 이상한 건 그때 마음이나 지금 마음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 사람보다 영화가, 더 생각난다.
 친구 어머니가  시장 가는 길에 바구니 든 채 보고 나왔다는 만추, 늦가을은 맞지 않다고 제목 잘 지었다고 하시며 영화관 나올 때의 현실의 햇빛이 너무 싫었다고 하셨던 말도 생각난다. 지금 내 나이는 그때 그분보다 족히 열 살은 더 많다. 그러나 아직 내 삶의 만추는 오지 않은 것 같다.  삶을 송두리째  태우기에 아직도 미련이 많은 것이다.

 베란다에서 보는 가을 안개


경춘선을 타고 안개의 도시 춘천을  처음 갔던 날,  친구는 소양호 물안개를 바라보며 재수 시절 물리에 빠졌었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친구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호수의 물무늬였다. 그 눈빛은 내게 오래 남았다.  반면 뿌연 물안개는 내 관심을 그닥 끌지 못했다. 금방 드러날 어질러진 일상을  꽃 보자기로 슬쩍 덮어 눈 가리기 하는 것 같아 싫었다.

 그러나 오늘, 잊었던 정인(情人)이 소리 없이 방문한 것 같은 가을 안개를 보며 익숙해서 못 봤던 것들을 잠시 생각해 본다. 내가 아무리 앙앙불락 해도 세상은 내 보폭으로 걸어야 하고 내 시야만큼 보다가 가는 것이다. 오늘 아침 안개는 너무 세상의 이치를 아귀 맞추려 하지 말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우리 집 고양이는 내 작업을 방해하다가, 내 시선을 따라 안개를 보다 말다 졸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저 산 너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