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오세윤
황룡사 빈들에는 소리가 가득하다.
솔거의 노송에 참새 부딪치는 소리, 원효대사의 경 소리, 백 여 명 스님이 지나가는 장삼 가사 서걱거리는 소리, 구층탑 올라가는 소리 그리고 번갯불에 육중한 탑이 쓰러지는 소리, 다시 세운 탑이 몽고 침략으로 불탈 때, 바짝바짝 타들어갔을 경주시내 사람 마음이 잦아지는 소리까지.
여행스케치 당간 syston@hotmail.com
경주에는 빈 절 터가 많다.
분주한 마음을 털어내고 싶어 빈 공간이 주는 한가로움과 적요에서 마음의 여유를 얻고자 했을 때 절을 찾게 된다. 큰 절일수록 마당이 비좁게 가로 세로 들어서는 건물들을 볼 때면 마음도 옹색해진다.
경주의 빈 절터는 이런 내 바람을 담아 시야를 무한대로 확장시켜준다. 허공을 가르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한 때 융성했을 그 시간들이 스러져간 흔적을 더듬어본다. 무릇 우주의 모든 생명체는 생로병사의 사이클을 돈다. 황룡사도 그런 생명의 범주에 들어가고 싶었나 보다.
황룡사지는 온갖 꿈이 현실세계로 넘나드는 공간이다.
꿈은 우리의 영혼이 육신의 한계와 구속을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갈망하는 무의식의 세계다. 삶에 짓눌린 인간이 영혼의 자유를 통해 해방을 꿈꿀 때, 꿈은 하나의 실체로 다가온다.
쿵, 쿵, 쿵,
저 땅울림은, 신라가 마음을 다지는 소리, 백 년을 설계하는 달구질소리다.
늪지가 시간의 풍화작용을 거치며 뻘흙이 되고, 그곳을 메워서 절터의 기반을 다진 꿈의 초석자는 진흥왕이다. 꿈의 계시를 따라 궁궐터를 절터로 바꾸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신라인에게는 권력의 공간보다 정신의 공간이 더 절실한 시기였음을 시사한다. 법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보다 마음을 모으는 일이 더 긴요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진흥왕은 당대에 그 사업을 모두 이루려 하지 않았다. 손자 진평왕에 와서야 절의 금당이 만들어졌고 부족한 부분은 다시 증손녀 선덕여왕에게로 넘어갔다. 그 시대는 2세, 3세가 이어갈 수 있는 왕위 계승의 시대였으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성당이 144년 완공을 위하여 지금도 공사 중인 것을 보면 시대의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다.
진평왕은 치세를 위해 꿈을 만든 자이다.
하늘에서 내렸다는 진평왕 옥대는 소문이 무성하여 고려, 조선까지 전하지만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왕은 잦은 외침과 내란 속에 부대끼면서도 외교술로 왕권을 튼튼히 했다. 그의 천사옥대는 옥황상제의 꿈이 서려 누구도 범접 못할 위엄의 상징으로 왕을 보호하는 부적이 되었다. 신라인의 재치와 지혜는 진평왕의 옥대를 다시 신문왕의 만파식적으로 재탄생시킨다.
선덕여왕은 신라의 꿈을 꽃피운 사람이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승 자장 법사의 꿈 이야기가 나온다. 선덕여왕이 자장 스님의 꿈을 소중히 받아 9층 탑을 조성할 때, 신하들은 한 목소리로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데려와야 한다’고 했다. 신라의 기술이 백제에 미치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신하들의 합창소리도 황룡사 빈터에 스며있다. 아비지는 적국이 되기도 하는 이웃나라에 와서 탑을 세우는 마음이 복잡했으리라. 그런 고뇌를 신라인들은 또 꿈으로 해결한다. 아비지는 중단한 탑 공사를 신라 노승과 장사가 나와 기둥을 세우고 사라진 꿈을 꾼 것이다. 결국 아비지는 마음을 비우고 황룡사 9층 목탑을 완성했다. 이 과업은 우리나라 동쪽 끄트머리의 자그마한 도시가 동양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없다면 성사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라인은 변방은 곧 중심이 될 수도 있다는 꿈을 현실로 구현했다. 80미터 높이의 동양 최대 목조 9층 탑이 경주시내를 아우를 때 이미 신라는 삼국통일의 길에 들어 선 것이다. 서로 예민한 관계였을 텐데 상대국의 높은 기술문명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대목에서 신라인의 자신감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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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은 그 꿈의 꽃씨를 널리 전파하는 통신사였다. 그때 글자를 알았던 사람은 6두품 이상이지 않았을까. 경덕왕은 문자 대신 소리로 백성과 만났다.
에밀레종보다 4배나 컸다는 황룡사 범종, 종이 울리던 시간은 삼라만상이 영겁과 조우하는 시간이었을 것 같다. 범종소리는 황룡사의 마당을 가득 채우고 서라벌 구석구석 나지막한 집들을, 아낙이 밥 짓는 부엌을 슬몃 지나, 망자들이 누워있는 무덤들을 위로하고 남산 숲 속의 새들과 나무, 맹짐승까지 가 닿았으리라. 만파식적의 전설적 피리소리도 이런 범종소리가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다시 황룡사 빈터에 서서 일연스님을 생각한다. 몽고 침략으로 탑이 불타고 경주시내에 한 달 동안 연기가 휩싸였을 때, 백성들의 자존감도 바닥으로 내려앉았을 것이다.
정신의 기초가 무너지려고 할 때 일연스님은 융성했던 황룡사의 소리를 썼다. 그 소리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기원의 소리가 아니었을까.
삼국유사는 발로 쓴 꿈 이야기다. 일연스님은 고려시대 격동기인 13세기를 전쟁 속에서 살았다. 황룡사가 불탈 때 그는 30대였으니 당시 정황을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황룡사가 불탔는지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다. 대신 꿈의 영역이, 정신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우리에게 남기고 갔다. 삼국유사를 쓰려고 70세의 나이로 인각사로 들어간 스님의 뒷모습은 황룡사 빈들의 바람소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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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지는 신라인의 꿈이 실현되고 무너진 공간이다. 주춧돌과 파편으로 남아있는 빈터는 영원한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