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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경인 Apr 26. 2022

강요배의 호박꽃

-호박꽃, 호박

강요배의 호박꽃을 처음 본 것은 어느 신발업체에서 나온 달력에서이다.

책상용 달력이라 그림이 차지하는 면적은 엽서 크기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그러니까 원화로 본 것도 아니고 그 달력에 적힌 설명대로라면 전체의 일부분인 그림이었다.

그 달력은 <호박꽃> 외에도 제주 출신 작가 강요배의 그림 3점을 더 싣고 있었다.

좋은 그림을 만날 때 기분은 좋은 시를 만났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몇 줄로 이루어진 시 한 편에서 한 권의 산문에서도 얻지 못했던 희열과 충격을 맛보기도 하는데 좋은 그림은 한 술 더 떠서 '언어'자체를 무상케 한다.

한 사물에 이러저러 주를 단다는 것이 어쩐지 어줍고 심지어는 조잡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태초에, 인류가 말을 배우기 전부터 그림이 있었을 테니까.

호박꽃이 언제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평소에 장미나 마아가렛을 좋아했던 내 심약한 미의식이 이 그림을 대하는 순간 심한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그 꽃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당황하였다.

화려하게 치장을 한 여인이 나부(裸婦) 앞에서 느끼는 곤혹스러운 남루함이랄까.... 노란 색채감 속에는 싱싱하고 강인한 생명력이 분출하고 있었다.

<호박꽃> 그림 속에는 몸뻬 차림에 늘 분주하던 어머니 모습, 한 시도 쉬는 법 없이 우영팟( 텃밭)에서  온종일 꼼지락거리시던 할머니의 손놀림이 어우러져 있다. 힘찬 호박 줄기의  푸르름 속에는 돗 거름*낸 손을 갈옷에  쓱쓱 비비고 밥솥에 찐 호박잎을 입이 미어지게 먹던 아버지의 모습도 있다.

이 그림을 보며 나는 어렵지 않게 할머니 집 텃밭 동지 나물 꽃이 진 자리에서 솥뚜껑처럼 커다란 잎사귀를 뚫고 솟아나던 호박꽃을 떠올릴 수 있었다.

동시에 말할 수 없는 편안함이 졸음처럼 혼곤하게 밀려왔다.

그림이라곤 고등학교 1학년 때 과제물로 그린 정밀 스케치 몇 장이 전부였던 나였지만, 강요배의 그림을 만나며 내 가슴 어느 언저리에 내재되어 있던 정서의 현(弦)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강요배 <호박꽃>, 캔버스에 유채, 45.5*53, 1992


이 떨림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내가 고수한(?) 미의식은 무엇이었기에 속살같이 다정한 호박꽃 몇 송이에 여지없이 뒤집히고 마는가.  <호박꽃>을 위시한 강요배의 그림들을 보면서 내 마음 밑자리에서 일어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고향 상실과 그 산업화의 목표인 서구화 흐름에 따라 내 정서의 본질 도 그 급류에 휩싸여 서구적 미감으로 덧씌워져 있었던 것이다. 아, 나는 고흐의 현란한 노란색에 적응해보려고 얼마나 부질없는 노력을 하였던가. 그의 유명한 <해바라기>의 탐욕스러운 황금빛 앞에서는 감당하기 버거운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나의 아둔한 감수성만 탓했었다.

  이제 나는 비로소 당찬 줄기를 뻗으며 산뜻하게 피어난 노란 호박꽃 속을 편안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친화감은 생활과 밀접한 구체적 감수성이었기에 그 정서가 부딪치는 울림은 그토록 크고 깊었던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충격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귀덕 호박>, 캔버스에 아크릴릭, 112* 145.5, 2010


호박꽃의 화가는 그 후 호박을 많이 그렸다. 특히 누렇게 익은 늙은 호박을.

  귀덕은 화가가 사는 마을 이름으로 영등 바람(북서계절풍)이 제주도에 상륙할 때 맨 처음 들어오는 곳이기도 하다.  < 귀덕 호박> 그림에서는 호박 줄기에  눈이 간다. 그 푸르고 탱탱하던 줄기가 말라비틀어지며 호박은 제대로 익어 간다.  그러나 내겐 호박꽃의 감동이 더 컸다. 그러고 보니 나는 과정에 더 관심이 있는 듯하다. 시험공부를 할 때도 족집게를 해본 적이 없고 공부량에 비해 성과는 대부분 시원찮았다. 정답에는 관심이 없고 해답을 찾으며 돌아다닌 것이 내 삶의 편력 인지도 모르겠다.


강요배 <설중옹>, 캔버스에 아크릴릭, 91* 72.7, 2012


    호박꽃을 그리고 20 년 후 화가는 눈발 속의 늙은 호박을 그렸다. 거친 눈발을 뒤집어쓴 이 호박 한 덩이를 보노라니 울컥해진다.  가슴이 뻐근해지며 눈물이 날 것 같다. 나도 그림과 더불어 늙어가고 있는 것이리라. 저 늙은 호박이 눈발을 뒤집어 써도 무르지 않는 것은 기계 주름처럼 뚜렷한 제주말로  '갑'이 외풍을 막아주고 있어서일 것이다.


사오기 궤 위의 호박


 고향을 떠난 지 오랜 내게 늙은 호박은 유년의 뒤뜰이다. 우리 집 거실에 장식품이 있다면 호박 몇 덩이다. 여름 끝무렵에 슈퍼마켓에 나온 호박 몇 개를 사 죽도 쑤고 한 입 크기로 잘라 삶아 통깨 살살 뿌려 나물로도 먹는다. 그리고 한두 개는 남겨 세 계절 동안 완상 한다. 저 호박 속이 바짝 말라 수축된 속살만 남을 때야 나는 마지막 호박죽을 쑤어 먹는다. 내 삶이 호박만큼 만 돼도 괜찮겠다.




* 돗 거름: 돼지 변소에서 보리짚 등으로 만들어진 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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