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민진의 " 파친코"를 읽고
독서모임 <4.3 문학회>에서 올해는 제주 4.3을 세계문학 속에서 살펴보자고 커리큘럼을 만들었는데 "파친코"는 그 첫 번 째 책이었다. 서울 등지에 사는 이들이 모여 재일작가 김석볌의 " 화산도" 10권을 완독하는 것으로 출발한 이 모임은 4년 째 진행되고 있다.
소설 "파친코"는 1900년부터 1989년까지 4대에 걸친 이야기로 1916년쯤 태어난 선자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선자의 아버지 훈이는 속칭 언챙이라 부르는 신체장애자였다. 어머니 양진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임차권을 잃은 소작인 집안 막내딸이다. 양진의 부모는 입 하나 덜기 위해 막내딸을 조혼시켰다.
부산 영도에서 여관업을 한 선자 부모는 세 자녀를 전염병으로 잃고 막내 선자 하나를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그 시대는 영아 사망이 흔했다.
발랄하게 성장한 선자의 모습에 반한 고한수는 일본과 부산을 오가는 생선 도매상이다. 그러나 한 발 더 들어가면 딸을 셋 둔 일본 야쿠자의 사위였다. 주위에서 만나는 조선인들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고한수의 아우라, 그것은 돈의 위력이고 문명의 냄새이기도 했다. 선자는 그런 고한수에 매료되어 임신하지만 현지처의 신세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과감히 결별, 혼자 키울 결심을 한다. 그 시대 관습으로 아버지 없는 아이를 낳아 키우겠다는 선자의 결기. 이 결심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선각자 여성이었다. 무엇이 그녀를 사회적 관습의 벽을 뛰어넘는 당찬 여성으로 만들었을까. 부모의 사랑, 특히 선자가 13살에 사망한 아버지의 깊은 사랑이 선자를 자존감 높은 여성이 되게 하지 않았을까.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는 사위의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부유한 일본인에게 쌀을 파는 사람들 틈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선자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절대적 사랑은 평생 밑천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훈이는 선자에게 '너만 귀하고 높은 사람'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임신한 선자를 아내로 맞은 목사 이삭의 사랑은 일제 강점기의 기독교 한 흐름을 보여준다. 그러나 선자 어머니 양진은 사위가 될 목사 이삭에게조차 기독교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 좋은 신이라면 우리 자식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신은 믿을 수가 없어, 예.(양진)
-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가 잃고 선하다고 모든 것을 행하신다면 우주의 창조자가 되지 못하셨을 겁니다. 우리의 꼭두각시가 되고 말았겠죠. 그런 분은 하나님이 아니지요...(목사 이삭)
혼배성사를 부탁받은 목사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선자와 이삭이 결혼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이 아니라고 질책했다.
- 어쩌면 제 목숨이 그 가족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전 죽기 전에 중요한 일을 하고 싶다고 늘 생각했어요. 사무엘 형처럼 (이삭)
결혼 절차를 마치고 선자는 이삭과 오사카로 떠난다. 이 소설에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은 부산 영도-> 오사카-> 도쿄-> 나가노-> 요코하마-> 뉴욕으로 확장되었다가 다시 오사카로 돌아온다.
이삭의 큰형 사무엘은 고향 평양에서 3.1 운동 때 옥사했다. 둘째형 요셉은 그런 삶이 버거워 일찍 오사카로 건너가 자리를 잡고 이삭을 부른 것이다. 오사카로 간 선자는 같이 살게 된 시아주버니(요셉)가 자신들을 일본으로 오게 하려고 진 빚을 정리하기 위해 금시계를 전당포에 판다. 고한수가 영도에서 선자에게 선물한 스위스제 금시계는 고한수의 선자 추적의 단서를 제공하며 선자와 고리를 이어가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고한수는 선자의 행동반경을 꿰고 있으면서 어려울 때마다 몰래 선자를 도와준다. 고한수 재력은 야쿠자에게서 나온다. 파친코 산업은 고한수 장인처럼 야쿠자들이 관리하고 고한수는 고급 정보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하지만 그를 관리하는 것은 일본 우파 정치인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은 약 2백만 명이었다. 그들 중 2차 대전 후 130만 명이 귀국하고 70만 명은 그대로 남았다. 이들을 자이니치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재일 코리안 전체를 아우르는 말로 쓰인다. 해방된 조국으로 허겁지겁 귀국했던 많은 이들이 여전히 먹고살기 힘든 조국의 현실에 절망하며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에서 배가 한 척이 나가면 두척이 들어온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대부분 밀항으로 간 이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구역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갔는데 그 중심이 오사카였다.
내 고향 제주에서도 인 친척들이 일본 가서 돈 벌어 오겠다며 가서는 겨우 입에 풀칠만 하고 사는 사람도 많았다. 어디나 돈은 소수가 벌었다. 이들이 일본 사회에서 적응하며 할 수 있는 직업군은 제한돼 있다. 그중 파친코는 돈 잘 버는 직종으로 70%가 자이니치다. 일본인은 파친코를 즐기지만 그 직업 종사자들은 경멸의 대상이다. 파친코의 특성상 수입통계가 정확히 잡히지 않지만 한때 일본 자동차 수출보다 높았다.
고한수는 제주 출생이다. 오사카에 사는 자이니치 중 제주인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들은 대부분 노동자들로 사회주의 노동운동 속에 자신을 의탁해 생업을 꾸렸다. 그 중에는 고한수 같은 인물도 나왔을 것이나 주류를 비껴서서 인물이 부각되는 점이 아쉬웠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을 쓴 것이므로 독자가 다큐를 요구할 권리는 없다. 고한수가 파악한 자이니치의 삶은 어떠한가.
- 좌파는 징징거리는 인간들이고 우파는 완전히 바보들이다. 애국주의는 신념일 뿐이야.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지. 하지만 신념에 빠지면 자신의 이익을 잊어버릴 수가 있어. 책임자들은 신념에 빠진 자들을 착취할 거고.
당시 오사카를 중심으로 자이니치들의 노동운동이 활발했고 일본인 공장에서 일하는 조선인들은 노동운동단체나 조직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책에서 작가는 이 흐름은 넘어가고 과도할 정도의 복산을 깔면서 고한수와 선자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일본 주류 사회의 매너를 착실히 따르는 고한수의 생물학적 아들 백노아의 가장 큰 비밀은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과 일본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노아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괴테이고 그는 와세다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다. 노아가 벗어나고자 한 삶이 그의 지적 편력 속에도 보인다. 하지만 그도 자이니치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등장인물 중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인물은 선자의 큰아들 노아다. 노아는 아버지가 목사 이삭인 줄 알고 깊이 존경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그는 신을 믿지 않았고, 조선인을 벗어나 일본인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런 내밀한 갈망으로 노아는 생활 전반에 성실하였다. 그러나 와세다 대학의 합격 후 대학생활을 가능케 하는 경제적 힘은 아버지 고한수의 능력이었다는 것을 알고 몹시 좌절한다. 노아는 고한수의 피를 거부하며 16년째 나가노에서 일본인 이름으로 살다가 어머니 선자가 찾아왔을 때, 45세의 생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일본인 처 자식을 남겨두고서.
장로교회 목사 아버지(이삭)는 하나님의 의도를 믿었지만 친아들 모자수는 인생이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기대하는 파친코 게임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일본 사회에 순응하여 파친코 업을 한다.
- 전 이 더러운 업계에서 일하는 조선인이에요. 제 피 속에 부르는 야쿠자 기질이 절 지배하는 것 같아요.
순한 양 같은 선자의 동서 경희의 삶도 백이삭 목사의 삶만큼이나 기독교 사랑의 전형을 보여주며 독자들을 순화시킨다. 병든 남편을 돌보는 경희에게 지순한 사랑을 보내는 경상도 남자 창호, 그와 결합을 간곡히 바라는 선자에게 경희는 말한다.
- 나는 그를 보낼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어. 주님이 내가 그를 보내기를 바란다는 걸 알고 있었지. 그런 식으로 두 남자의 보살핌을 받는 게 옳은 일은 아니니까.
선자는 생각한다. 왜 사람은 자신의 곁에 한 사람만 두어야 하냐고, 선자의 사랑은 고한수에게도 남아있었던 것이다. 선자는 사랑에 희생이 따르는 것이라면 이삭은 진정으로 선자를 사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경희가 두 남자를 사랑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 외의 많은 인물들, 가령 재봉사 유미에게 조선인이 된다는 것은 또 다른 끔찍한 지옥이다. 일본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계모와 같다며 할리우드의 재봉사가 되는 꿈을 안고 모다수와 결혼한다. 탈출구를 미국으로 잡은 유미의 꿈은 아들 솔로몬을 구하려다 교통사고로 끝났다.
솔로몬과 미국 유학 동기인 일본 여성 피비는 작가 자신이 아닐까. 코즈모폴리턴적인 인물이고자 했으나 그녀 또한 주류 미국인처럼 살지는 못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녀는 솔로몬을 따라 일본으로 왔지만 일본에서조차 자신의 마이너리티를 확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이 소설의 몇몇 장치는 앞으로 민족 간의 화해와 극복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시사한다. 그 예가 유미를 교통사고로 잃은 모자수에게 다가온 에스코라는 일본 여성의 사랑이다.
2부는 1부에 비해 빠르게 진행되고 글의 분위기도 퍽 달라져 마치 다른 작가가 쓴 글 같다. 시대와 상황의 분위기를 묘사하기보다는 사건 중심으로 전개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등장인물이 60 여 명이 되는 것도 몰입을 방해한다. 어쨌든 자이니치 2세대 노아는 자살하고 3세대 솔로몬은 일본 속의 조선인으로 적응한다. 미국인이 되고 싶지 않은 솔로몬의 선택에 대하여 작가는 독자에게 묻고 있다.
-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요, 저는 당신들이 자신으로 살기를 권합니다.
흐르는 세월은 현명한 양진을 평범한 노인네로 만들어 자기 아들밖에 모르는 선자가 야속하고 천사같이 무구한 경희에 마음을 기댄다. 남편 백이삭의 무덤을 찾아간 선자의 독백으로 소설의 마지막은 끝났다.
- 남편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아름다움을 찬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삭은 노아의 고통을 이해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자가 그리워하는 것은 젊음과 시작, 소망이었다.( 이삭의 무덤 앞에서)
이 소설의 강점은 일본인을 잔혹하게 조선일을 선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일본의 인종 민족 차별은 보여주지만 고한수처럼 검은돈을 따라서 일본 우익 정치계 충실한 하수인이 되는 조선인도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일본 사회의 계급 신분 문제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점이 이 소설의 단점이 되어 하루코나 유미 등의 인물을 충분히 녹여내지 못한 감이 있다. 그러나 소설의 첫 문장은 소설 속 모든 사람들의 마음일 것이다.
작가 이민진은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월남한 분으로 서울에서 화장품 회사 영업사원이었고 부산 출신 어머니는 피아노 선생님이었다. 한국의 중산층이라 할 만한 이민진 가족은 작가가 8살 때인 1975년 도미하여 뉴욕에 정착했다. 고국을 떠난 이유는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한다. 작가는 브룽크스 과학고를 거쳐 예일대 경제학과- 역사학과. 조지타운대 로스쿨을 졸업하였다. 작가의 부모도 우리나라 보통 부모들처럼 딸을 과학영재 코스로 보냈을 것 같은데 인문학을 택한 것을 보면 이과 적성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학업을 마친 작가는 미국에서 기업 변호사 활동기간 2년 정도 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소설가로 전업하였고 2008년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이후 작가는 일본계 미국인 남편과 일본에 5년 체류하면서 현장 취재를 하고 이 소설을 썼다. 완성까지 27년이 걸렸다고 한다.
" 역사가 우리를 망쳐놓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안나 까레리나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처럼 아마 소설사에 남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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