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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경인 May 12. 2022

권진규의 조각1

- 고양이 테라코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가 열리고 있다. 이십 대부터  머릿속에는 그의 조각상  점이 들어있었다.    현대미술관 전시에서 그의 아트리에를 재현한 기획전시는  속의 권진규(1922-1973) 넘어서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번 전시(2022.3.24-5.22) 작품 양이 많기도 했지만(240  ) 다시 권진규의 예술 세계  앞에서 서성이는 나를 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중학 동창 벗들과 가볍게 전시장에 들어간 나는 전시장 반쯤 돌았을 때쯤 입이 마르고 허기가 져서 전시관을 빠져나왔다. 나머지는 다음에 와서 보리라,  이상 작품 감상할 에너지가 남아 있지 많았다.

  내가 꽂힌 여러 조각 작품 중 <고양이> 시리즈도 눈에 들어왔다. 집에 고양이를 식구로 맞아들이면서 내게 생긴 변화 중에는 TV 프로그램 중 동물의 왕국 같은 유형의 다큐를 찾아본다는 것도 있다. 그러면서 생명의 범위를 넓혀가게 되는데 늘 경건함과 심란함이 교차한다.


<고양이>, 테라코타 채색 1960년대, 23.5*39*23


  이집트의 고분에서 나왔음직한 고양이다. 고양이와 인간이 공유한 역사는 길고도 길다. 영물이라고도 하고 무정한 동물이라고도 하는 고양이, 이 조각은 인간에게 길들이기를 거부하는 고양이 원형 같기도 하다. 반려동물이니 애완 묘니 하는 말을 거부하는 듯 생명의 원초적 모습은 그들이 주체가 되어 살았던 야생의 역사를 더듬게 한다.


 <검은 고양이>, 테라코타 , 45.2*43*16.2,1963


 우리 집 고양이가 늘 취하는 자세로 요가에서도 이 자세를 체형교정을 위해 도입한다. 진흙을 개어서 형상을 만들어 불에 굽는 과정에서 태어난 권진규의 <검은 고양이>는 훅 ~ 숨을 불어대면 살아 움직일 것 같다.  이 포즈는 인정머리라곤 없는 우리 집 고양이가 외출에서 돌아온 나를 향해 취하는 포즈다. 이 정도가 나를 반기는 최대치 표현이고 , 밥 달라 할 때 외엔 엉기는 일이 없다. 서재에 박혀 있으면 놀아달라고 살짝 깨물어 나를 의자에서 떼어낸다. 다행인 것은 포기가 빨라서. 내 다리 사이를 어슬렁거리다 한편에서 그것도 깨끗하고 포근하고 반듯한 곳을 골라 점을 자는 것이다. 고양이가 있는 풍경이다.


우리 집 고양이 토토


놀아달라고 몇 번 보채다 포기하고 한 구석에서 자는 모습을 보면서 뭍 생명에게 휴식과 잠이 주는 위로를 생각한다.


 뒤에서 촬영한 검은 고양이


예술가란 사물의 생리를 깊이 통찰하는 사람들이다. 고양이 생태를 생동적으로 포착한 권진규 조각(테라코타)을 보면 실제 고양이와 다르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모사의 단계일 것이다. 권진규의 검은 고양이는 여기서  꼬리를 한껏 강조한 뒤태를 보여주며 다리보다 더 중요한 신체부위라고 말하는 것 같다.  최근 작고한 이어령은 " 하늘을 나는 앨버트로스가 땅에 내려오면 바보가 되는 것처럼 그게 예술가다. 날아다니는 사람들은 걷지 못한다. 그게 예술가다."라고 했다. 권진규의 죽음을 우울증이라고 하는 시선에 대해 같은 예술 세계를 걸었던 친척 화가 권옥연이나 권진규 기념사업회를 이끄는 조카는 "예술의 한계에 대한 절망"이 주요 요인이라고 말한다.  권진규도 시인 이장희도 자살로 생을 마친 예술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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