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현재 근무하는 HR 스타트업은 한국 본사 말고도 일본, 홍콩, 대만, 싱가폴에 지사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일본 지사가 가장 오래되었다. 또 일본 자체가 워낙 인력난이 심하다 보니 일본 지사야말로 한국에서 인재를 채용할 가능성이 ('크로스보더 채용'이라고 하더라) 어쩌만 가장 크고, 실제로 일본 기업의 니즈가 많은 것으로 안다. 하지만 일본어 장벽 때문인지, 해외취업 치고 일본 취업이 자기 생소하기 때문인지 채용되는 사람은 기대만큼은 많이 나오지 않아서 내부에서 이런저런 활성화 방안을 내놓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에 하루는 포탈에 무심코 우리 회사 이름을 검색했다가 누군가가 쓴 블로그 이직 후기를 발견했다. 요약하면 '일본 이직에 성공했다'는 이야기였다. 다른 것도 아닌 우리 서비스를 통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 바로 인터뷰를 요청하여 진행하게 되었다.
주제가 '일본이직'이었기 때문에 인터뷰 질문은 일본 이직에 관심 있는 사람이 궁금해할 법한 것들 위주로 구성했다. 일본어 실력은 어느 정도 필요한지, 면접 볼 때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지 등등. 감사하게도 경험자만 줄 수 있는 좋은 조언을 많이 주셨다. 다만 내가 일본 이직을 실제로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더 구체적으로 질문하지 못한 게 아쉽다.
사실 이직 스토리 그 자체보다도 (문화인류학을 전공하다 보니) 사람과 문화에 늘 관심이 많은 나에게 흥미롭게 느껴진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지방에 남는 일본 청년들
일본 사람들이 성실하다는 것은 편견이다?
인생은 타이밍이다
슬기님이 이직을 결심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남자친구가 일본에 있다는 것을 듣고 '아아, 역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친한 친구 중에도 오랫동안 미국 취업을 준비했고 실제로 임박한 친구가 있는데, 걔도 애인이 미국에 있다. 그리고 진~짜 사랑꾼이다:)
사실 해외취업이라는 게 말은 멋지고 그럴듯해도 가족도 친구도 없는 먼 타국에서 혼자 생활하려면 얼마나 힘들 것이고, 그런 결단을 하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하겠나. 뚜렷한 현실적인 이유가 없는 이상 실제로 마음먹기 정말 어려울 것 같다. 다르게 말하자면, 사랑의 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다. 사랑은 역시 위대하다.
생각지 못한 것에서 한국과 문화가 달라서 흥미롭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일본 기업들이 지방의 청년들을 끌어오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일본은 구직난이 심한데, 슬기님의 말에 따르면 "일본의 학부생, 그중에서도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 하는 지방에 사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기업과 매치해주는" 서비스가 있다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일본 지방 학생들의 경우 정보도 부족하고 그 정보를 얻으려고 도쿄, 오사카 등 큰 도시로 가기에는 교통비가 어마하게 들어요. 그래서 큰 도시에서의 취업을 쉽게 단념해버리는 사람이 많거든요. 그런 분들을 위해 교통비를 지급하면서 설명회에 참여하게 하고, 기업 담당자와 연결해주는 거예요.
큰 도시에서의 취업을 단념한 사람들은 그냥 고향에서 취업하고 결혼해서 평생을 산다고 했다.
한국의 경우 많은 젊은 사람들이 서울에 오고 싶어 하고 서울에 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일본은 지역색이 강한 데다 도쿄, 오사카로 올라오는 게 쉽지 않아요. 그래서 자신이 태어난 곳에 머무르면서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서 사는 경우도 많아요.
대학 졸업 후 취업한다고 하면 너무 당연하게 서울, 부산 같은 큰 도시에서의 취업을 생각하는 나에게는 갓 졸업한 대학생이 지방에 머무른다는 게 생소하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일본은 지방 소도시가 발달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그래서인가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큰 도시에서 스카웃하고 싶어 하는 학부생 중에는 분명 그냥 고향을 좋아해서 남는 이들도 있을 텐데 도시로 가느냐 고향에 남느냐가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부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지방과 대도시의 격차가 너무 커서 무조건 대도시로 오려고 하니까.
일본에서 초등학교까지 나온 친구가 오랜만에 일본에 놀러가 초등학교 때 친구들을 만났다던 이야기도 생각났다. "그동안 연락했던 거야?"라고 하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동네가 옛 모습 그대로고, 친구들도 초등학교 때 살던 집에 그대로 살고 있어서 그냥 찾아갔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는데 ('초등학교 때 살던 집을 아직도 산다고?') 친구는 일본 사람들은 한 집에서 평생을 사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고향에서, 내가 태어난 집에서 평생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모르긴 해도 정이 많이 들 것 같다. 나는 어렸을 때 살던 동네가 재개발로 통째로 없어졌는데, 그런 것을 생각하면 좀 씁쓸한 마음이 든다.
"일본에서 한국 인재를 선호하나요?"라는 질문에 슬기님이 "많이 선호한다"고 답하며 말한 이유 중 하나가 '성실함'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오면 일을 정말 열심히 해요. 일본 사람들이 성실하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에요. 특히 저희 또래 세대가 ‘유토리 세대’라고 해서 입시 경쟁에서도 벗어난 세대고 그러다 보니 마인드가 프리한 사람이 많아요. 그렇다 보니 한국 사람들도 일본 사람들 못지않게 경쟁력 있죠.
'유토리 세대'에 대해 찾아보니 "일본에서 개성을 강조하며 '여유 있는 교육'을 교육 목표로 삼고 제창되었던 교육 방식(출처:나무위키)"이라고 했다. 계속 이어지는 일본에서 '유토리 세대'에 대한 시선은 다음과 같다.
위험이 크고 도전정신이 필요한 일이나 힘든 일을 피하고 남들에게 의존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
책임보다 권리를 우선시하는 것
매사에 열정적이지 않고 적당 적당히 하자는 사고방식
남의 말을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하는 것
왠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다. 기성세대(a.k.a. 꼰대)가 한국 청년들을 비판할 때 하는 말이다! 나는 꼰대에 대한 엄청난 반감 의식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이 비판하는 한국 청년도 일본에 가면 '정말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된다는 게 웃기면서 씁쓸했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청년세대(20대 중후반)는 일본처럼 여유 있는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오히려 엄청난 경쟁식 교육을 거쳤다. 그렇게 대학을 왔건만 졸업하니 취업이 너무 어렵다. 내 주위 사람들만 봐도 다들 참 열심히 산다. '일본 사람도 인정하는 성실함'을 보유했다는 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하니 마냥 기쁘지만은 않고 오히려 좀 씁쓸했다. 여유 있는 교육을 거쳐 프리한 마인드를 갖게 된 유토리 세대, 한국엔 언제쯤 가능하려나.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거창하게 쓸 건가 싶기도 하지만 슬기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기님이 첫 일본 이직을 준비할 때만 해도 정보도 기회도 지금처럼 많지 않아서 결국 포기했다는데 그게 겨우 3~4년 전이다. 다르게 말하면 3~4년 사이에 일본 취업이 엄청 활발해지고, (우리 서비스처럼) 적극적으로 구직자와 일본 회사를 매칭해주려는 곳도 속속들이 나타난 것이다.
일본 취업이 이렇게 잘될 줄 알았으면 고등학교 때 일본어 공부나 열심히 할 걸 그랬다(제2외국어가 일본어였음).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가 고등학교 때는 중국이 유망하니까 중국어를 공부하라고 했는데, 실제로 중국어 공부한 사람이 다 취업을 잘한 건 아니다. 오히려 일본어가 더 취업이 잘 된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다.
3~4년 안에 채용 트렌드도 바뀌었는데 다른 게 못 바뀔 것도 없지 않나.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고 쉽게 좌절하거나 실망해서는 안 되는 것 같다. 다만 타이밍은 준비된 사람만 잡을 수 있다고, 한국에서 계속 일본 컨텐츠 관련 업무를 해온 슬기님을 보면서 느꼈다. 그러니까 언제나 열심히 살자. 인생이라는 타이밍을 잡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