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선생 Aug 21. 2017

'진정한 나'의 탄생? 매일매일이 당신 생일!

김광규의 <나>와 신해욱의 <축, 생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화 속 나르시스는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존재의 이유를 찾으려 했지만, 결코 자신의 욕망을 충족할 수 없었다. 공교롭게도 홀로서기만으로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인할 수 없으며, 내가 ‘나’로 올곧게 설 수 있으려면 언제나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불과 수십 년 전과 비교해보아도 삶의 영역은 무척 넓어졌다. 이제는 나와 타인이 직접 만나 정을 나눈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언제나 누군가와 맞닿아 있는 느낌을 갖고 싶어 한다. 그들로 인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고 싶다. “몸이 멀어져도 마음은 가까울 수도 있지”라는 바람을 지금은 SNS가 어느 정도 채워 주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SNS와 현실의 분리 속에서 나 자신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 괴리감이 크면 클수록 고통스러워하기도 한다.


살펴보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고
나의 형의 동생이고
나의 동생의 형이고
나의 아내의 남편이고
나의 누이의 오빠고
나의 아저씨의 조카고
나의 조카의 아저씨고
나의 선생의 제자고
나의 제자의 선생이고
나의 나라의 납세자고
나의 마을의 예비군이고
나의 친구의 친구고
나의 적의 적이고
나의 의사의 환자고
나의 단골 술집의 손님이고
나의 개의 주인이고
나의 집의 가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들이고
아버지고
동생이고
형이고
남편이고
오빠고
조카고
아저씨고
제자고
선생이고
납세자고
예비군이고
친구고
적이고
환자고
손님이고
주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

과연
아무도 모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김광규, <나>  


    위의 시는 형식적으로 봤을 때 아름답게 잘 만든 시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질문은 우리들이 지금까지도 해결하지 못한 그것이다. 나를 존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많은 타인으로 인해 ‘나’는 순간순간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시인의 말처럼,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기도 하고, 친구의 친구이기도 하며, 심지어 적의 적이기도 하다. 누군가와 만남을 통해 ‘나’는 ‘과거의 나’와 전혀 다른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수많은 나의 모습을 획득하는 것이라면, 나는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기를 반복하는지도 모른다. 국어사전에 실려 있는 대로라면 생일은 그저 ‘태어난 그날’, 그리고 ‘해마다 찾아오는 태어날 그날’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내가 될 수 있다는 걸 생각한다면 ‘생일’은 그저 ‘태어난 그날’만 가리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목구비는 대부분의 시간을 제멋대로 존재하다가
오늘은 나를 위해 제자리고 돌아온다.

그렇지만 나는 정돈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나는 내가 되어가고
나는 나를
좋아하고 싶어지지만
이런 어색한 시간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점점 갓 지은 밥 냄새에 미쳐간다.

내 삶은 나보다 오래 지속될 것만 같다.

- 신해욱, <축, 생일>


    사실상 우리가 '나' 자신에 대해서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날은 생일 때뿐인지도 모른다. 생일을 축하해주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내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텅 빈 방 안에서 홀로 서글픈 마음을 달래기도 한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평소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바쁘게 지내던 사람도, 생일이라는 그 특별한 날이 되면 나 자신에 대해서 유독 집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일을 축하받을 때 느끼는 기쁨과 행복이나, 그렇지 못할 때 느끼는 슬픔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 것일까. 분명히 내가 태어난 과거의 바로 그 날은 아닐 것이다. 오직 나는 내 주위의 사람들을 향해 있다. 내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태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현재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관심은 1도 없지만, 어쨌든 태어나서 우리와 함께해 줘서 고맙다!"라는 축하를 받고 싶은 것일 게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생일을 축하할 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내 친구의 ‘태어난 그날’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만, 지금 나의 곁에서 함께 웃고 울어주는 소중한 사람이기에 그의 생일을 축하한다. 그저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로 만나 지금껏 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기에, 힘들어하고 방황하던 학창 시절 나와 함께 고민하고 힘이 되어준 친구이기에, 어느 순간 나에게 인연으로 다가와 사랑스러운 연인이 되어준 사람이기에 그들의 생일을 축하한다. ‘나’와 ‘너’가 만남을 통해 서로에게 새로운 의미로 태어나는 모든 순간들이, 어쩌면 우리들의 진정한 생일인지도 모른다. 


    특정한 날에 태어난 그런 단독자로서의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관계 맺으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다른 모습으로 변화해 나아가는(혹은 그래야만 하는) '내 삶'보다 결코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모르는 '진정한 나'의 모습을 찾는 것이 과연 큰 의미가 있는 것일까. 신해욱 시인의 말을 빌리면, 나 자신을 정돈하는 것보다 그저 매 순간 내가 되어가고, 그렇게 마주하는 나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나의 진짜 삶이니까. 특정한 날에 태어난 특정한 이름을 가진 나에 대한 축하는 어색한 것일 뿐! 


    ‘삶’이란 곧 ‘사람’과 ‘사람’이 뒤엉키는 것이다. 어쩌면 ‘삶’과 ‘사람’ 모두 ‘ㅅ, ㅏ, ㄹ, ㅁ’으로 이루어진 것도 그 때문은 아닐까라는 상상을 해 본다. 혼자서 진정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거듭 생각한다. ‘생일(生日)’은 ‘태어난 그날’이면서, 살아가는 ‘생’의 날이고, 매일매일 새로 태어나는 ‘생’의 날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자신이 태어난 과거의 그날을 기념하는 생일은 이제 그만두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소중한 나의 사람들을 만나 전혀 다른 나를 발견하는 행복을 느끼는 삶의 순간순간에서 나의 생일을 찾아보는 게 타당할 것만 같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세상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는 생일 축하 노래다. 삶의 매 순간 조금씩 달라지는 나의 모습을 만끽한다면, 나로 인해 변해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 행복하다면 언제든 부를 수 있는 노래인 것 같다. 여러분의 생일은 언제인가? 1984년 몇 월 며칠인가? 아니다. 당신은 오늘도 어제도 새롭게 태어났고, 심지어 내일도 새롭게 태어날 사람이다. 그러므로 매일매일이 당신의 생일이다. 우리 모두의 생일이 오늘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생일을 축하한다.


"당신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영웅의 이정표는 자신의 발자국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