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선생 Aug 26. 2017

검정, 모든 빛을 머금은 검정

박성우의 <아직은 연두>와 <난 빨강>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 이외에도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을 가르칠 기회도 많았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에게는 바른 언어생활에 대해서 강의를 했었고, 고등학생에게는 시 창작 강의와 자기소개서 작성에 관한 강의를 몇 차례 할 수 있었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과 달리 초중고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것은 대단히 힘들면서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물론 한편으로는 '강의를 위한 강의'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어서 다소 실망스러울 때도 있었다.


나는 대한민국 청소년이 처한 현실을 그리 좋게 바라보지는 않는다. 나 역시 평범한 대한민국의 중고등학생 시절을 거쳐서 별 볼 일 없는 지방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지만, 적어도 지금 현재의 청소년들은 정말 자신이 원하는 삶을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청소년이라는 단어에서 핵심은 그들을 ‘푸른색’으로 본다는 점이다. 파릇파릇한 현재의 시간은 물론이고, 희망으로 가득한 앞날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2010년에 청소년 시집을 펼쳐낸 박성우 시인은 청소년을 두 가지 색으로 표현했는데, ‘연두’와 ‘빨강’이 그것이다. 연두는 말 그대로 아직 완전한 초록색으로 무르익지 않은 새싹의 느낌을 주고, 빨강은 어른들은 감히 용납하기 힘든 발칙한 상상력으로 어른들이 설정한 각종 금기를 넘어서고 싶어 하는 청소년의 바람을 담고 있다. 그럼 시를 인용해 볼 테니 한 번 읽어 보시라. 굉장히 재미있고 쉬운 시이다.


난 연두가 좋아 초록이 아닌 연두
우물물에 설렁설렁 씻어 아삭 씹는
풋풋한 오이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옷깃에 쓱쓱 닦아 아사삭 깨물어 먹는
시큼한 풋사과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한 연두
풋자두와 풋살구의 시큼시큼 풋풋한 연두,
난 연두가 좋아 아직은 풋내기 같은 연두
연초록 그늘을 쫙쫙 펴는 버드나무의 연두
기지개를 쭉쭉 켜는 느티나무의 연두
난 연두가 좋아 초록이 아닌 연두
누가 뭐래도 푸릇푸릇 초록으로 가는 연두
빈집 감나무의 떫은 연두
강변 미루나무의 시시껄렁한 연두
난 연두가 좋아 늘 내 곁에 두고 싶은 연두,
연두색 형광펜 연두색 가방 연두색 팬티
연두색 티셔츠 연두색 커튼 연두색 베갯잇
난 연두가 좋아 연두색 타월로 박박 밀면
내 막막한 꿈도 연둣빛이 될 것 같은 연두
시시콜콜, 마냥 즐거워하는 철부지 같은 연두
몸 안에 날개가 들어 있다는 것도 까마득 모른 채
배추 잎을 신나게 갉아 먹는 연두 애벌레 같은, 연두
아직 많은 것이 지나간 어른이 아니어서 좋은 연두
난 연두가 좋아 아직은 초록이 아닌 연두
-「아직은 연두」 전문
난 빨강이 끌려 새빨간 빨강이 끌려
발랑 까지고 싶게 하는 발랄한 빨강
누가 뭐라든 신경 쓰지 않고 튀는 빨강
빨강 립스틱 빨강 바지 빨강 구두
그냥 빨강 말고 발라당 까진 빨강이 끌려
빼지도 않고 앞뒤 재지도 않는 빨강
빨빨대며 쏘다니는 철딱서니 같아서 끌려
그 어디로든 뛰쳐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빨강
난 빨강이 끌려, 새빨간 빨강이 끌려
해종일 천방지축 쏘다니는 말썽쟁이, 같은 빨강
빨랑 나도 빨강이 되고 싶어 빨랑
빨랑, 빨강이 되어 싸돌아다니고 싶어
빨빨 싸돌아다니다가 어느새 나도
빨강이 될 거야 새빨간 빨강,
빨강 치마 슈퍼우먼이 될 거야
빨강 구름 빨강 바다 빨강 빌딩숲 만들러 날아다닐 거야
새빨간 거짓말 같은 빨강,
막대사탕처럼 달달하게 빨리는 빨강,
혀를 내밀면 혓바닥이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 있을 것 같은 달콤한 빨강
빨─강, 하고 말만 해도
세상이 온통 빨개질 것 같은 끈적끈적한 빨강
-「난 빨강」 전문


인용한 박성우의 시 두 편은 청소년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두 가지 시각을 압축하고 있다. <아직은 연두>에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초록’이라는 색깔을 향해 아직 성장을 거듭해야 하는 미완성의 존재를 볼 수 있다. 어른들의 세계는 청소년에게 하나의 도달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초록은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성장한 청소년을, 국가의 발전에 도움을 줄만한 인재로서 성장한 청소년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청소년에게 좋은 대학과 좋은 직업, 풍족한 수입과 안정된 생활을 꿈꾸게 만들면서, 그들이 어른이 설정한 가이드라인으로서 초록을 향해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반면 <난 빨강>에서 청소년은 위험하고 위태롭기 짝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의 상태에 있으며, 어른들은 청소년의 빨갛게 달아오른 심신을 달래야 할 의무를 지닌다. 박성우의 탁월함은 빨강을 부정적인 색깔로 드러내지 않고, 그것이 곧 청소년다운 것임을 긍정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는 것이다. 어른의 시각에서 볼 때, 빨강은 청소년의 위태로운 모습이지만, 동시에 청소년이기에 생각할 수 있는 뜨거운 욕망이기도 하다. 아직 철이 들지 않은 그래서 더 자유분방하게 많은 것을 상상하고 꿈꿀 수 있는 청소년 말이다.


그러나 필자가 궁금한 것은 과연 청소년을 연두(초록)와 빨강이라는 두 가지 색으로만 바라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재미있게 표현하기는 했으나, 이 두 가지 색 역시 청소년을 어떤 특정한 상태로서 규정하고자 하는 어른 시각이 반영되지는 않았는가 조심스럽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다. 청소년은 어른들이 정해놓은 진로인 녹색을 향해 나아가는 연두이거나, 어른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빨강이어야만 하는 것인가. 더 나아가 예전에 청소년이었던 우리들은 어떠한가. 우리는 초록이 되었는가, 아니면 빨강이 되었는가.


학교에서 학원에서 주중에도 주말에도 그저 열심히 남들과 똑같이 공부하고, 남들과 똑같이 가야 한다고 하니까 대학을 준비하는 그런 수많은 학생들은 연두이기도 하고, 마음속으로는 감히 꺼내지 못할 빨강도 지닌 복잡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우리들도 남들처럼 직장에서 일하고 월급날을 기다리고, 그 돈으로 각종 공과금을 내고 대출을 갚으며 겨우겨우 살아가는 평범한 한국 어른들이다. 이를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색깔이 있다면 무엇일까. 필자는 그것을 감히 '검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겨우 생각해 낸 색깔이 검정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서글프지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지만 정작 색깔다운 색깔로는 취급되지 못하는 ‘검정’은 가장 보편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삶다운 삶'이라는 인상을 주지는 못하는 우리와 닮아 있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색깔 있는 펜'을 빌려 달라고 하면 대개 빨간색을 빌려준다. 다른 색은 없느냐고 물어보면 파란색이나 형광색을 꺼내 놓는다. 이런 색깔들이 필통에 없으면, 부탁을 받은 사람은 미안한 듯 말한다. "아, 나한테 검은색밖에 없네"라고. 우리는 늘 검은색을 쓰고, 그래서인지 검은색을 색깔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만 같다. 검은색은 '아무런 색깔도 아닌 색' 다시 말해 역설의 색이다.


'색깔' 혹은 '색깔 있는'이라고 인정하는 범위에서 벗어나 있는 검정을 '개성'과 관련시키면 어떨까. 누군가 "나는 어떤 색깔의 사람인 것 같아?"라고 물었을 때 되돌아오는 답이 "음, 넌 검은색(검정)이야"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망하고 말 것이다. 화려한 색깔이 많은데, 왜 하필 검은색인지 궁금할 수도 있다. 검은색이 '악(惡)'하거나 '추(醜)'한 것의 상징처럼 느껴질 수 있고, '개성 없는 심심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다. 기왕 '아무 색'도 없다고 할 거라면, 차라리 '흰색'으로 불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지금 우리는 너무나 다채로운 색깔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같은 색이라도 더 선명한 색깔이 되기를 원한다. '색'에 대한 감각(생각)의 변화는 삶의 내용-우리의 생각과 가치관, 먹는 음식의 맛, 사랑의 방식과 유형,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과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쉽게 짐작이 가겠지만, 우리는 누군가에게 자극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고정관념을 깨고 창의적인 생각을 하고 싶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중에 지켜야 할 본질적인 것들이 등한시되곤 한다. 또 우리는 담백한 맛을 찾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져 있다. 사랑과 인관관계도 마찬가지. 그 속에서 진정한 배려와 인내와 양보를 찾아보기 힘들다. 나를 자극할 수 있는 사람과 만나야 하지만, 우습게도 너의 색깔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나의 색깔을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과는 쉽게 이별하려고 한다. 그리고 어떤 꿈을 선택하고 나아갈 때에도 마찬가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남들과 무조건 달라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나의 색깔을 일깨울 수 있는 진정한 가르침일까. 물론 섣불리 판단할 수 없기에 대답하기도 조심스럽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과 다른 삶의 방식을 갖는 것이 '개성'을 찾는 길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이 사는 모습과 내가 사는 모습이 똑같다고(닮았다고) 해서, 개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피카르트의 책 『침묵의 세계』을 읽어보면 '침묵'은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모든 소리의 가능성을 잉태한 충만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침묵은 반드시 소리에만 한정되지 않고, 많은 영역에서 상징적으로 읽힐 수 있다. 검은색은 모든 빛을 집어삼킨 블랙홀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든 색을 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다.


예전에 <무한도전> 선거 특집에서 정형돈은 '평범한 사람'이 세상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특별한 사람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세상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했다. 예능에서 하는 말이었지만, 그것은 사뭇 진지했다(우리는 또 다른 예전의 <품절남> 특집 때 정형돈이 자신을 '대한민국 99% 남자'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오히려 나와 다른 모든 사람들의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도 행복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개성 넘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자신이 받아들인 모든 가능성 중 하나가 실현되면 그것을 행복하게 누리는 사람. 그 사람을 두고 개성 없는, 재미없는, 수동적인 삶을 산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래전 우리 부모와 부모가 된 우리,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지금도 남들과 다를 바 없는, 그렇지만 분명 다른 각자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멀리서 보면 칙칙한 검정 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사실 "모든 빛을 머금은 검정"이니까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진정한 나'의 탄생? 매일매일이 당신 생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