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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Aug 27. 2017

사랑을 해도 외로울 수밖에 없네

마종기의 <아내의 잠>

지금 당신의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란히 걸어가고 있을 수도 있고, 함께 앉아 있을 수도 있고, 함께 누워 있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함께 있음에 감사하며 행복이라는 포근한 이불을 덮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랑을 하면 언제나 '행복'을 떠올린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할 때면 웃음이 번지고, 그 웃음은 곧 장난스러운 손짓과 몸짓으로 이어지고, 이내 둘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황홀경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것이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사랑은 '내 앞'에 온전히 발가벗겨진 상대방을 '마주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솔직하게 헐벗은 상대방을 완전히 포용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인지도 모른다(사랑에 대한 단 하나의 정의가 없으므로 필자도 그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 대한 완전한 이해와는 다른 것이며, 사랑은 일종의 초월적인 경험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젊은 브래드 피트의 꽃미모를 감상할 수 있는 유명한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목사인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브래드 피트다!)의 죽음을 애도하며 설교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는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다는 내용의 대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만큼 완벽한 유대를 형성하는 것이 없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다. 정말이지 사랑은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만드는 감정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랑의 모습은 그렇게 이상적이고 행복하지만은 않다. 분명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끊임없이 다투고, 그렇게 다투어서 헤어질 것처럼 상대방을 비난하면서 이내 다시 화해하는 연인들의 모습이 현실적인 사랑의 초라함을 보여주고는 한다. 한 평생을 배우자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쉽게 헤어지지 못하는 부부의 모습도 우리는 여러 매체를 통해서 목격하고는 한다. 후자의 경우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뿌리 깊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 문화를 비판하지는 않겠다. 그런 이야기를 다루어야 한다면, 다른 글에서여야만 할 것 같다. 적어도 여기에서는 사랑이 100% 행복으로 이루어진 감정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언제나 마주하고 있다. 만나서 인사를 나눌 때, 함께 앉아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실 때, 헤어지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그 사람의 얼굴을 마주 본다. "먼저 들어가"라고 말하는 연인의 배려는 솔직히 말하면 그의 뒷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은 이기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뭔가 감춰야 하는 것이 있을까? 심지어는 돌아가는 연인의 뒷모습을 굳이 감상하고자 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뒷모습은 어쩌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인지도 모른다. 앞에서 활짝 웃고 나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의 모습이 사실은 꾸며진 것임을 증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 마종기 시인의 <아내의 잠>이라는 시가 있다. 시인은 한밤 중에 아내의 울먹이는 모습을 보면서 한 여자, 나아가 한 인간의 깊은 내면과 그 속에 존재하는 외로움과 슬픔을 본다.


한밤에 문득 잠 깨어
옆에 누운 이십 년 동안의 아내,
작게 우는 잠꼬대를 듣는다.
간간이 신음 소리도 들린다.
불을 켜지 않은 세상이 더 잘 보인다.

멀리서 들리면 우리들 사는 소리가
결국 모두 신음 소리인지도 모르지.
어차피 혼자일 수밖에 없는 것,
그것 알게 된 것이 무슨 대수랴만,
잠속에서 작게 우는 법을 배우는 아내여,
마침내 깊어지는 당신의 내력이여.

- 마종기, <아내의 잠>


우리나라 중년 여성의 대부분은 위와 같은 경험을 하고 있으리라. 가부장적인 남자와 그런 남자를 닮아 있는 시어머니,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무뚝뚝하게 뒷짐을 지고 있을 뿐인 시아버지 등. 이런 관계는 더 이상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찾아보기 힘들다고 생각하지만, 불과 10년? 아니 어쩌면 바로 어제 이웃의 어느 집안에서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 시에서 마종기 시인이 한밤 중에 목격한 아내의 모습은 아무래도 '뒷모습'일 것이라는 점이다. 아내의 울먹이는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면서 이와 같은 생각들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아내의 입장에서도 남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면서 울음을 지속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사람은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씁쓸한 진리를 이야기하면서, 남편인 자신이 잠든 사이에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울먹이는 아내를 무뚝뚝한 듯 그러나 가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목격하고 싶지 않았던 순간인지도 모른다. 짐짓 모른 채 살아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기어코 아내의 울음을 목격했고, 그 순간 아내의 깊어지는 내력을 알아차린다.  


우리는 늘 사랑하는 사람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 한다. 나와 함께 있을 때면 행복하기만을 바란다. 그렇지만 그것만큼 잔인한 욕심이 있을까. 우리가 정작 보려고 해야 하는 것은, 그가 애써 감추려고 하는 마음속 깊은 곳의 슬픔이 아닐까. 그리고 그가 뒤에 숨기고 있는 진짜 본인의 모습이 아닐까. 내 앞에서 웃고 있는 그가 사실은 울고 있는 뒷모습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그를 조용히 안아 줄 수 있다면 당신은 진정 그를 사랑하는 것이리라.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인정하듯이, 사랑은 100%의 행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니까. 사랑은 행복 한 스푼에 슬픔 반 스푼, 고독 반 스푼, 질투 집착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한 조합으로 이루어진 감정이니까.


100%의 행복으로만 사랑하고 있지 못한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그럼에도 사랑하는 것이 분명한 당신 앞에서 오늘도 밝은 모습을 보이려고 애쓴 그 사람. 오늘 사랑하는 그 사람의 등을 말없이 어루만져주면 어떨까. 그리고 조용히 느껴보라. 당신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 애써 감추고 있는, 행복 말고도 그의 사랑을 채우고 있는 여러 가지 감정의 온도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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