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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Oct 14. 2020

‘탈-남성’을 시도하다가는 ‘탈 남’

다만, '탈-남성'을 향한 꿈은 버리지 말기로 해요



아침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 차량을 기다리는 엄마와 아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엄마 손을 잡고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지만, 심지어 끌려가다시피 하는 아이들까지 있다. 차량이 도착하면 선생님이 내려서 밝게 웃는 얼굴과 ‘솔’ 톤의 목소리로 아이들을 차량에 태운다. 아이들이 모두 타면 선생님은 엄마들을 향해 공손히 인사한 후 차량을 출발시킨다. 엄마들은 아이들을 향해 힘차게 손 흔들며 송별 아닌 송별을 한다. 차량이 떠난 후 아쉬움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일터로 흩어지는 엄마들.

왜인지 오늘, 전쟁터에 나가는 아들과 남편을 송별하던, 입영 열차에 몸을 싣는 연인에게 눈물 흘리며 손을 흔들던 그 옛날 기차역 풍경이 겹치는 건, 지금이 가을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의 서글픈 메커니즘을 보았기 때문일까.


2005년 2월 라디오에서는 考 김광석(1964.1.22.~1996.1.6.)의 10주기를 기념하는 내용이 흘러나왔다. 김광석의 생애와 명곡을 감상하며 논산 훈련소에 도착했을 때, 정문에는 거대한 환영 현수막이 보였다. 입소식이 열리기 전까지 소소한 행사들이 진행되었다. 입소 예정자를 무대로 불러 긴장을 풀어주기도, 부모님과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입소 시간에 맞춰 연병장에 모이면, 훈련소장의 따뜻한 격려와 부모님을 향한 인사말을 들은 후 작별했던 것 같다. 이제 안심하고 모두 돌아가시라는 안내를 받고 떠나가는 부모님들의 모습이 어느 정도 보이지 않게 되었을 무렵, 훈련소의 분위기는 뒤바뀐다. 고성이 오가고 온갖 거친 말들이 쏟아졌다. 아무리 친자식처럼 보살피며 훌륭한 장병으로 육성하겠다는 말을 들어도, 쉽게 발을 떼지 못하는 부모들이 그것을 듣지 못했을 리 없다. 특히 ‘엄마들’이 훈련소를 빠져나가며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그 소리들이 만들어 내는 이미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군대가 대중매체에 공개되고, 인권에 관한 여러 조치들이 취해지면서 과거처럼 군대가 거부감으로 가득한 듯 보이지는 않는다. 적어도 군대를 바깥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병역의무자가 아니라면 군대가 그래도 갈만한 곳이라고 생각할 수도, 군필자라면 ‘요즘 군대가 군대냐?’라는 비난과 탄식으로 현시대의 군 생활을 평가 절하할 수도 있겠다.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아들이 “어린이집은 무서운 곳이어서, 속상해서 가고 싶지 않다”라고 똑 부러지게 말했다. “밥 빨리 먹으라고, 색칠을 빨리 하라고 ‘선생미’가 화냈다”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들이 쏟아내는 정확한 문장들은 나에게 더 없는 걱정과 불안을 안겨준다. 심지어 엉덩이를 때리기까지 했다고 말했지만 그 말은 사실, 자신이 엉덩이가 아프다고 하자 집에서 엄마가 해 준 것처럼 엉덩이를 주물러 주었음이 드러났다. 엄마와의 분리에서 오는 공포감이 어린이집의 모든 상황을 과장하는 듯했다. 실제 어린이집 생활에서도 나름대로 즐겁게 생활하고 있음을 알았고 말이다.

사실, 아들이 어린이집을 무서워할 때, 보내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만약 아이의 말이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한 술책이라면, 나는 아이에게 어떠한 노력도 시도하지 않고 포기하는 것만 가르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아직 3일밖에 안 되어서 그래. 무섭다고 느끼는 건 공감하지만 적응하려고 노력해 보자”라는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사실, 아이들의 육아를 조언하는 방송에서조차 결국은 아이의 의견을 부모의 의도대로 수정하는 작업이다. 다만, 그 수정의 과정이 차분하고 이른바 민주적으로 보인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들의 공포와 거부감, 엄마가 없다는 사실에서 느끼는 속상함은 결국 극복해야 할 나약하고 부정적인 감정에 불과하다. 그래서 아들은 아빠의 단호한 선언(이해하지만 동의할 수 없다)과 엄마의 격려와 응원(무서운 곳이지만 이미 잘 해내고 있는 걸?) 속에 그러한 감정들을 이겨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이 ‘성장’이라고 믿는다. ‘아이들’의 ‘부모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언젠가 캐럴 길리건의 책을 이야기하면서, 남아들이 5세 즈음에 이미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숨기고 외부에서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게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성장한 남아들이 여성들을 배제한 남성 중심사회의 일원이 되었을 때, 나약한 목소리를 내지 ‘않아야 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감정을 드러내고, 공감과 연대를 형성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남아들. 큰 위기 상황에서 남성들이 쉽게 무너진다는 분석심리학의 설명(아니마&아니무스)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홀로 좌절감에 못 이겨 생을 마감하거나, 일가족을 살해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가장들을 통해 충분히 증명되었다. 

물론, 일자리를 잃었음을 고백했을 때 공감과 위로보다는 윽박지르는 아내가 더 많다고 가정하면 결국, 우리 사회의 가정 대부분에는 오직 ‘남성’만이 존재했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가 ‘남아’, ‘여아’ 할 것 없이, 고정관념으로서 ‘남성성’에 익숙하도록 키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먼저 경쟁에서 이기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하며,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 우리가 그토록 비판하는 ‘남성성’을 강요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눈물을 흘리고 주저앉고 싶을 때, “괜찮아, 일어나. 넌 할 수 있어! 내가 함께 뛰어 줄게!”라고 말하는 ‘러닝메이트’ 대신에, “야, 그러다가 뒤처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정신 차려!”라며 다그치는 대신에, 함께 주저앉아서 같이 울어줄 수 있는, “그래, 어차피 삶의 끝은 죽음인데 뭣 하러 아등바등 살아야 해? 네가 정말 하고 싶은 걸 해. 그게 주저앉아 쉬는 거라면 그냥 그걸 해. 그러다 후회되면? 그땐 다시 일어나서 걸으면 되지.”라고 말할 수 있는 관망자가 필요하지 않을까? 아니, 그런 관망자가 존재할 수 있는 사회가 먼저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제는 감당할 수도 없을 만큼 성장해 버린 거대한 자본(사실은 추상적인 수치에 불과한 그것. 차라리 모두가 ‘0’으로 돌려 버리자고 약속할 수만 있다면 아무 의미도 효력도 없는 그 숫자)을 떠나버릴 수만 있다면, 우리가 이처럼 ‘남성’이 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이라도 욕심을 가진다면, 추상적인 수치는 물질적 풍요의 유일하고 확실한 증거가 되고, 그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서 우리는,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운명에 갇힌다. ‘뭐? 쉰다고? 잘 됐네. 나는 더 달릴게! 너보다 더 앞서 갈 거야.’


오늘도 어린이집에 울면서 갔다는 아들이 그래도 지난 며칠보다 나아졌다고 한다.

아들은 ‘나아지고’ 있는 걸까, 아니면 아름답고 멋진 생명체에서 고리타분한 인간으로 나아가고 있는 걸까. 혼란스러운 생각도 잠시, 나는 내가 멈춰 있음을 느끼고 다시 달릴 준비를 한다. 미안하다, 아들아. 아빠에게는 세상을 바꿀 힘이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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