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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Apr 10. 2023

'말'과 '예절' 그리고 '지위'(2)


  탱크를 타고 나타났다는 이유만으로 반격할 필요는 없다. 정말 탄을 쏘았더라도 굳이 반격할 필요는 없다는 은유에 관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 누군가의 말이 거칠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향해 곧장 맹비난할 필요는 없다에 답해야 한다. 여기에도 마사 누스바움의 이론이 필요할 듯하다.      


  마사 누스바움은 어떤 경우에도 분노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물론, 그가 내세우는 궁극적인 상황이 친밀한 관계와 중간영역을 넘어 정치적 영역이었지만 말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분노, 짜증이 좋지 않음은 물론이고, 피해를 갚아주거나 용서해 주기조차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한 감정과 행동들은 모두 과거에 집착한 결과이며, 미래를 향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심지어 그는 간디와 킹, 만델라의 ‘비-분노’를 분석하면서 만델라의 그것을 가장 우위에 두고 있다. 만델라는 잘못을 떠올리지 않으며, 그것에 관한 사과를 요구하지도 않고, 오직 미래를 열어나가는 것만 생각한다. 그래서 남아공의 아프리카너와 흑인 사이의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과거를 되묻고, 사죄를 받고 용서를 하는 절차 대신, 그저 새로운 미래를 향한 이행을 실천할 뿐이다. 아마,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이행-분노’를 제시하는 누스바움에게 만델라의 경우가 가장 적합했으리라 짐작된다(475-489면).      


  한편, 간디는 가장 많은 비판을 받는데, 간디가 내세우는 ‘비-분노’가 철저한 ‘비-폭력’으로 귀결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에서는 경찰의 폭력에도 철저한 비폭력을 유지하면서 쓰러지는 시위행렬과 그것을 지켜보는 이의 불편함이 인용된다. 그것은 단지 서양인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일반적인 사람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였으리라고 본다.     


  누스바움이 간디의 비-분노를 비판한 또 하나의 이유는, 간디가 자신에게 가혹했던 이유가 ‘비-분노’를 위한 절제였다기보다 ‘자아-분노’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누스바움은 간디의 실제 언급을 바탕으로 삼는데, 아버지가 임종하던 순간 아내와 사랑을 나누던 자신을 향한 극도의 분노를 바탕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간디의 비-분노는 욕망에 흔들린 자신을 향한 분노와 철저한 복수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452면). 누스바움은 책의 끝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쓰고 있다.      


  비-분노에 실패하는 경우가 자주 벌어지더라도 우리는 자신에게 가혹하게 굴 필요가 없습니다. 간디는 본인을 가혹하게 대했으나, 그런 가혹함은 비-분노에서 수반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일종의 자아-분노였다고 저는 주장했습니다. 간디 자신은 깨닫지 못한 게 분명하지만요(495면). (…) 엄청난 불의가 있을 때에도 우리는 그 사실을 유치하고 무절제한 행위의 핑계로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불의에는 저항을 통해서, 그리고 신중하고도 용감한 전략적 행위를 통해서 맞서야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 목표를 언제나 시야 내에 두고 있어야겠죠. 킹이 매우 간단하게 말한 목표, 그러니까 “남자들과 여자들이 함께 살 수 있는 세상” 말입니다. 그런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지적 능력과 통제력, 아량의 정신이 필요합니다(497면).     

  다양한 말이 쏟아지고 있다. 이 순간, 내가 ‘발행’과 ‘저장’이라는 두 개의 선택을 놓고 고민하는 순간에도 이미 많은 글이 발행되고 있다. 많은 영상이 촬영, 편집, 업로드, 공유되고 있다. 누군가는 인공지능을 활용해 글과 사진, 영상을 복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만들었든 인공지능이 만들었든 어쨌든 다양한 발언이 쏟아지는 요즘이다. 이런 말의 시시비비를 가리느라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말의 진의(眞意)를 가리고, 그 말이 적절한 말이었는지를 따지는 과정은 누스바움의 말처럼 (적어도 정치적인 영역에서는) 생산적이지 못하다. 박제된 시간을 향해 쏟아내는 온갖 비판들. 그것은 국민의 미래는 물론이고, 서민의 미래도 열어주지 못하니까 말이다.      


  한편, 중간 영역과 친밀한 영역에서 우리가 쏟아낸 말들은 어떨까? 한 개인의 가슴에 구체적으로 남을 그 말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과거를 향한 집착을 버리고, 미래를 향한 건설적인 논의를 하는 게 가능할까? 부부나 연인의 싸움은 과거의 잘못을 끄집어내며, 망가진 관계의 지분을 누가 더 많이 가지고 있느냐를 따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을, 절친과의 절교는 결국 갚지 못한 과거의 잘못이 누적되거나 곰삭은 결과임을, 모든 정신의학적 진단은 과거의 잘못을 끄집어내어 환자 자신을 향해 울부짖게(간디처럼 자기를 증오하게) 만드는 치료행위를 동반하고 있음을, 우리는 부정하기 힘든 듯하다.     


  마사 누스바움의 분노에 관한 거부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는(내가 분노에 취약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바로 그것이다. 너무나 이상적이어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가 인용하는 스토아학파와 세네카, 간디, 킹, 만델라의 행위가 일반적인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지금껏 되새길 필요가 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력해야 할까? 아마, 그럴 것 같다. 그것마저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쁜 것에 집착하며 지겹도록 지껄이기보다는 좋은 점을 보고 추구하는 인내심 있고 관대한 입장”(497면)을, 비록 언제나 실패하더라도, 잊지 않아야 한다고 말이다.      


  ‘말’은 한 사람의 ‘지위’를 ‘격상’하거나 ‘손상’한다. 그리고 지위가 격상된 사람이든 손상된 사람이든 ‘말’에 주목한다. 그 말에 근거하여 자신의 ‘지위를 격상한 사람’을 ‘챙기’고, 자신의 ‘지위를 손상한 사람’을 ‘내팽개친’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거나 빚을 지면서 살아가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 아닌 듯하다. 우리의 말 한마디는, 준마(駿馬)든 둔마(鈍馬)든 천 리를 넘어 영원히 멀리 가 버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야만, 바로 이 세상, 지금 여기에 진짜 사랑이 싹틀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 글은 마사 누스바움이 『분노와 용서』에서 제시하는 정치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분노와 용서, 앙갚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대한민국이 현재 경험하고 있는 수많은 정치·사회·외교 문제에 관해서도 받아들일 만한 주장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누스바움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상처를 준 모든 사람, 지울 수 없는 피해를 준 사람을 이유 없이 용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어 더 좋은 미래를 만들어 가자고 웃으며 제안해야 한다. 설령, 그가 다시 삐딱한 모습으로 나온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책을 읽다 보면, 다소 이해할 수 없고 불편한 서술도 보인다. 그의 주장이 확실히 가치가 있음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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