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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Apr 20. 2023

끝까지 벗어날 수 없는 관계, '나'와 '나'

도덕적 당혹감에 관한 나의 생각

https://m.blog.naver.com/blueday282/222886431855

  일요일에 부모님과 동네 카페에서 돈가스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가게 텔레비전에서 <집사부일체>라는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그 방송에서는 조너선 하이트의 책에서 소개한 사고 실험으로 토론을 진행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고, 위의 블로그에서 발췌했다.

(서양 문화권에서) 어느 날 한 가족이 기르던 개가 차에 치여 죽었습니다.
이 가족은 개고기가 맛있다는 걸 익히 알고 있어서 죽은 개를 요리해서 먹었습니다.
가족의 이런 행동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상상된 상황에서 '가족'의 행위는 도덕적(윤리적)인가, 비도덕적(비윤리적)인가를 판단해 보라는 것이다. 방에서 정재승 교수와 출연자가 토론한 내용은 아래 블로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방송을 보지 못했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https://m.blog.naver.com/cestetreseul/223076754372

  나에게 '도덕적 당혹감'이라는 개념을 논할 자격이 충분하지 않기에, 단지 내가 방송을 보면서 생각한 '이 가족이 비도덕적, 비윤리적인 이유'를 거칠게나마 정리해 려고 한다.


  '윤리'는 '관계'가 필요하다. 시대적 상황에서 자신이 부끄럽다고 생각한 윤동주. 그<자화상>에는 '부끄러움'의 작동 방식이 정확하게 나타난다. 바로 '사나이와의 대면'이다. '우물 속 사나이(우물에 비친 자신)'와의 대면이 없었다면, 윤동주는 그를 미워할 조차 없었다. 그가 시대가 요구하는 윤리를 따르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럽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이유는(쉽게 시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던 이유는) '사나이'와 끊임없이 '관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론, 자신과 달리 일제에 맞서 싸우는 이들과의 관계도 일차적으로 작용했을 테지만 말이다.


  사실 '관계'라는 단어를 '''타인'의 만남이라는 개념으로 한정할 경우, '윤리'에 관한 나의 발언은 허구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관계'로써 살아간다. 사실, 조너선 하이트의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례도 나온단다. 제일 처음 제시한 블로그에서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남자가 마트에 가서 생닭을 사 온 뒤 거기에 자위를 하고 깨끗이 씻어 요리해 먹었습니다.


  이 사고 실에서 우리가 남자의 행위를 도덕적이다 비도덕적이다고 판단하기 전에 ' 혼자'였으리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는 '혼자' 있었고, '아무도' 그의 역겨운 행동을 '목격하지 못했으니', 이는 윤리적이라고 말하기 힘들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사실 서구 사회에서 수음이 큰 죄악 가운데 하나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적어도 기독교 전통에서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자신'과 대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위 사고 실험에서 문제를 삼아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그/가족'의 대면 여부를 따지는 게 아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과 윤리적으로 충돌할 여지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만을 가지고 행위자의 도덕성을 판단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사실, 정재승 교수의 설명에서도 우리의 '도덕성'이라는 것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집단의 성향에 따라 쉽게 결정되고, 혼자서만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믿고 있는 내용(정보)만으로 세상판단한다는 을 전제하고 있다. 정재승 교수는 방송 내내 "관계"에 관해서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관계'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자. 생닭에 자위를 하고 그것을 씻어서 요리해 먹은 상상 속 남자는 스스로의 행위가 전혀 역겹지 않았을까? 사실, 그것을 역겨워하는 자아가 분명히 존재했을 것임에도, 자위를 하고 싶다는 자아의 손을 들었을 것으로 판단해야 한다. 과학적으로는 아니겠지만, 철학적으로 '자아'는 단 하나의 단단한 물체가 아니라, '여러 자아'가 다발로 묶여 있는 형태임을 사회학자 미드가 주장한 바 있다. 정말 아무도 보지 않은 상황이더라도, '''수많은 나(자아의 다발)''대면'해야 하고, 그 '수많은 나' 중에서 '하나의 나'를 선택하여 행위한다. 따라서 골방에 홀로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는 말은 반쪽짜리 진실다. 골방에서 '수많은 나'와 내적 갈등(''들의 논쟁)을 거친 후에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여 행동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행위에는 책임이 따른다.


  이제 강아지에 관한 사고 실험으로 옮겨가 보자. 여기에서 주목할 수 있는 관계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가족과 개의 관계, 다른 하나는 가족과 다른 사람의 관계다. 다른 하나는 나중에 말하기로 하고 우선, 이 두 가지를 살펴보자. 왜냐하면 <집사부일체>에서 이 두 관계를 둘러싸고 논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방송에서는 포함하지 않았지만, 책에서는 "서양 문화권에서"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서구 사회에서 '''가족' '친구' '연인'과 같은 존재라고 상상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개고기에 관한 비난' 여론도 '유럽'에서 일어나고는 했으니 말이다. 이런 전제가 붙은 상황에서는 '가족'''의 관계가 대단히 '친밀한' 관계임을 떠올릴 수 있어서, 개를 먹은 가족의 비도덕성을 주장하기가 쉬워진다.


  '정'을 나누고 '사랑'을 나눈 특별한 존재를 단지 내가 죽인 게 아니라 사고로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터무니없는 소문'에 따라 요리해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인가. 납득하기 힘들다. 여기에서 '소문'이라는 존재가 매우 중요하다. '소문''나의 가치 판단이 아니라 타인의 가치판단'이다. 게다가 '출처가 불분명한 가치판단'이라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그런데 가족은 이런 불분명한 주장의 진위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가족처럼 기르던 개의 사체를 요리해서 먹고 만 것이다. 물론, 정재승 교수는 '먹을 수 있는 동물''먹을 수 없는 동물'로 구분하는 기준의 타당성을 두고 반론했고(단지 그의 역할이 그러했던 것이다), 그 판단의 기준이 무엇이며 그것이 윤리적인지에 관해 세부적으로 지속적으로 공격할수록 "가족 같이 여기던" 동물을 먹었다는 주장은 힘을 잃는다.


  두 번째는 '가족''다른 사람'의 관계이다. 이 논쟁의 결론에서 이 부분이 중요했다. '가족'그들이 죽은 개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 그것을 해체하여 요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먹고 잔해를 치우는 것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주변의 '어떤 사람'에게도 혐오감이나 불쾌감을 안기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의 행위는 '자유의지'따른, 그러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정당한(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대단히 논리적이다. 그래서 무섭다. 그러나 단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윤리적인 문제가 없다는 판단은 대단히 위험해 보인다. 이 말은 '들키지 않은 범죄''문제가 없다'주장과 묘하게 이어진다. 실로 수많은 '가정폭력', '학교폭력''데이트폭력'이 누군가가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선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따라서 큰 피해를 낳기도 한다. 심지어 봤지만, 보지 않은 것으로 결정하면서 가리는(심지어 사라지는) 범죄도 있다. 피해자가 아무리 자신의 피해를 주장해도 그것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가해자로 지목한 사람을 비난하거나 심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죄추정의 원칙' 따위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고, 그 원칙이 수많은 비윤리적 행위가 범죄로 확대되도록 방치하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내가 주장한 것은 단 하나다. 다른 사람이 봤느냐 못 봤느냐가 윤리적 판단의 잣대가 된다면, "봤다"라는 기준은 어디까지 적용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내가 볼 때, 그것은 ''' 자신'의 대면까지 확대해야 하고, 그가 자신의 악행을 부추기는 자아에 굴복하고 말았다는 사실에 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관계는 바로 '죽음을 맞은 개''다른 사람'의 관계이다. 생전에 그 '''다른 사람(개의 최후를 보지 못했지만 알고 지낸 사람)'과 매우 잘 지냈을 수 있다.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개의 주인(가족)''다른 사람'''의 관계에서 생성될 수 있는 '윤리적 선택의 가능성'(애도하거나 애도하지 않거나)을 가로막지 않아야 한다.


  엄연한 의미에서 '''주인(가족)'의 소유물이 아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 능동적으로 관계 맺을 수 있고, 그 관계를 누릴 권리가 있다. '개'를 알고 지낸 '다른 사람'도 아침마다 산책길에서 반갑게 인사하고 그 가족을 마주칠 때 함께 봤던 그 ''에게, 자신이 중시하는 윤리적 행위로써 관계를 정리할 권리가 미약하나마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자신의 '어머니'와 친하게 지내던 '이웃 아주머님'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이웃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지 않은 자녀를 상상해 보자. '이웃 아주머님'이 한참 뒤에나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어떨까. 우리는 자녀의 행동이 '이웃 아주머님'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지만, 물리적 물질적 피해만으로 한정한 단견이다. '이웃 아주머님'의 정서에 지울 수 없는 상처(피해)를 줬을지도 모른다. 작별의 기회조차 박탈당한 것이다. 


  더 길게 쓸 자리는 아닌 것 같아서, 졸고를 마무리한다.


  요점은 어떤 행위의 윤리적 정당성을 판단할 때, "누가 안 봤다"를 판단할 때, '자신'을 지우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는 '모든 행위''윤리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심지어 그 '윤리적 정당성'을 '음지'에서 확보하려고 할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난 행위이고, 사실상 아무도 물리적 피해를 받지 않았다면. 기껏 배신감밖에 없다면, 그건 비난하기 힘든 행위인 것일까? 


  내가 집에 혼자 있든, 거리에 아무도 없든, 늘 일관되게 행위하는 것이 전통적인 관점에서 '윤리적인 행위'이다. "그 사람, 참 일관된 사람이야"라는 말은, 그의 '도덕성'을 칭찬하는 것이다. 그 '도덕성''옳고 그름을 떠나 언제나 같은 가치를 선택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아무도 보지 않았으니, 단지 타인에게 전해 들은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개를 먹는 일은, 윤리적 정당성을 주장하기 힘든 행위이다. 그저, 눈치 보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꼴이다. 뇌 과학의 발견을 떠나서, 철학적으로 자아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지 않는 이상, '윤리'는 결코 어느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윤리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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