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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Apr 10. 2023

'말'과 '예절' 그리고 '지위'

  ‘나는’이라고 말하던 학생이 ‘저는’이라고 재빨리 고친다. 나는 고치지 말라고 했다.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음으로써 언어의 기능이 완성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적잖은 한국인이 ‘직장 상사’나 ‘선생(교사·교수)’, ‘부모’와 관계에서 ‘형식적인 존대’를 유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의견이 모든 한국인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들에게 ‘저는’이라는 단어를 반드시 지키라고 가르쳐야 하는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나의 담당 과목이 작문이고, ‘설명문’과 ‘논설문’ 따위에 ‘저는’이라는 표현을 쓸 필요는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면,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보다 존중하는 마음을 덜 전달하는 걸까? 중요한 건 ‘동의하지 않는다’라는 사실임에도, 많은 경우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나’인지 ‘저’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중학교 시절 ‘윤리’ 교사였던 박 모 선생님은 ‘~요’라는 말을 이른바 ‘극혐’했다. 숙제해 오지 않은 이유나 수업 내용에 관해 질문했을 때, ‘그런데요’, ‘있잖아요’, ‘아닌데요’ 들을 쓰는 게 싫었던 거다. 그런 말을 썼다는 이유로 크게 혼나는 친구들을 본 기억도 있다. 머리가 큰 것 말고는 눈에 띄지 않았던 나는 그런 말을 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당시 그 선생님은 그 말을 싫어하는 이유를 직접 밝히기도 했는데, ‘-습니다’가 훨씬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있잖아’, ‘그런데’, ‘아닌데’ 들에 ‘-요-’를 붙여 만드는 표현들이 진정한 존댓말로 보이지 않을 수 있었던 듯싶다. ‘-요’가 왜 좋지 않은지는 군대에서 뼈가 으스러지게 경험했다. 짬이 차면서 “아닌데 말입니다”라고 말하는 이유, 특정 계급이 되었을 때 그것을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도 비슷하다. ‘아닌데+요’ 대신 ‘아닌데+말입니다’ 형태로 설명할 수 있었다. 상급자를 향해 높임을 가장한 낮춤을 실현하는 꼼수였던 거다.      


  잘 아는 것처럼, ‘한국’을 나타내는 표현 중에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이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이 말을 “동쪽에 있는 예의(禮儀)에 밝은 나라라는 뜻으로, 예전에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이르던 말”이라고 풀이한다. 자신 이외의 다른 민족은 ‘오랑캐’로 여겼던 옛 중국에서 ‘동이족’을 가리켜 예의에 밝은 나라라고 말한 것은 어떤 의미일까?      


  공수민이라는 사람은 “또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示), 듣지도(聽), 말하지도(言), 움직이지도(動) 말라' 했던, 공자조차도 조선의 '예'를 배울 수 있다면 뗏목이라도 띄워 조선에 건너오고 싶어 했다.”라며(https://cm.asiae.co.kr/article/2018092707243920169) 동방예의지국인 한국의 위상을 설명했다. 그러나 공자가 춘추전국시대 인물이었음을 생각하면, 조선에 오고 싶어 했을 리가 없다. 공자를 위한 제사를 지내다가 그런 마음을 알게 된 것일까?

  한국민족문대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은 정보가 있다.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상고대 사회에서부터 예를 좋아하고 예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삼국 초기에도 전통의 제천 의례(祭天儀禮)에 유교적 국가 의례 제도인 시조묘(始祖廟)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때에는 태학(太學 : 國學)이 성립하고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文廟) 제도를 수용하면서 의례 문화가 향상되었다. 나아가 고려 시대에는 국가 의례가 정비되었으며, 특히 고려 말에 『가례』의 보급이 시작되었다(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7872).     

  ‘예’는 결국 ‘제례(祭禮)’, ‘제사’와 관계되는 것으로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 자체는 ‘인간관계’에 관한 판단이었다기보다, ‘인간’과 ‘하늘(신)’의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판단된 말이지 않았을까 짐작할 수 있다. 이 말이 점차 인간관계로까지 확대된 것이 아닌가 싶다.      


  유교에서 예는 그 근원에서는 형이상학적인 근본 개념으로 이해되면서, 그 실제의 적용은 다른 어떤 개념보다 더욱 구체적인 현실에 관여한다. 주희는 예를 ‘하늘 이치의 절도 있는 문채요, 인간 사무의 본이 되는 행동 규범(天理之節文 人事之儀則)’이라고 정의하였다. 실제로 예는 인간 삶의 중대한 일(冠婚喪祭)에서부터 이웃과의 일상적 교제에 이르기까지, 음식 · 의복과 앉고 일어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모든 동작을 규정하는 등, 생활 전반에 걸쳐 핵심적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유교 사회의 통치 기능과 더불어 유교 문화의 특징을 ‘예교문화(禮敎文化)’로 규정짓기도 한다(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7872).  

  결국 ‘예의’라는 것은 ‘힘(권력)의 관계’에서 성립한다. ‘예의를 갖춰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힘을 가진 사람’이다. 혹은 ‘힘을 가지고 싶은 사람’이 상대방을 억누르면서 강조하는 형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형식을 거부함으로써 진짜 친한 사람(이른바 ‘찐친’)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경향도, 예의를 갖추는 일이 결국, ‘권력 형성’에 이바지하거나, ‘권력에 의해 형성됨’을 인지한 데서 비롯하는 듯하다. 그렇기에 서로가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번거로운 예의범절’을 생략하기로 합의한다.      


  한 가지 우스운(?) 것은, 그러한 ‘예의범절의 생략’이 결과적으로 서로의 우정에 금을 가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뒤늦게 예의를 갖추려고 해도 불가능한데, 그 이유는 그는 예의를 지키지 않은 사람을 향해 “그가 ‘예의범절을 생략함’으로써 나의 지위를 손상했다”라고 믿기 때문이다. 관계의 복구는 상대방이 저지른 ‘실수’를 ‘용서’함으로써 가능한데, 이 용서는 자신의 지위가 복구된다는 믿음을 동반한다. 지위의 복구는 철저한 ‘교환적 용서’에 따라 이루어진다. 마사 누스바움은 ‘교환적 용서’를 비판하는데, 그것이 손상된 ‘자신의 지위(명예)’를 실질적으로 ‘회복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지위를 손상함’으로써 ‘만족감’을 느끼는 과정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지위가 만족할 만큼 손상’되었을 때 ‘용서’는 이루어지는데, 가해자가 자기 지위가 손상하는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사죄하기를 그치면, 용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게 중요하다(『분노와 용서』 135면에서 167면까지를 참고).     


  ‘말’, ‘표현’은 상대방의 지위를 격상시키거나 격하시키는 중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속담이 그것을 증명하는 증거로 지긋지긋하게 인용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천 냥 빚’을 갚기 위한 ‘그 말 한마디’를 찾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까?

     

  한국어는 고도로 발달한 경어법으로 인해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존댓말이라고 생각하는 단어가 예상치 못한 불쾌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반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뜻밖의 친밀감을 형성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는 앞에서 이미 말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좋지 않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전자는 어떨까?


  예컨대, ‘댁’이라는 단어가 그러하다. ‘댁’은 상대방의 ‘집’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댁’은 ‘택(집)’으로 읽히기도 한다. 한자로는 ‘宅’이다. 그런데 이 말이 때로는 상대방을 높이는 맥락이 아닌데도 사용된다. “그건 댁이 알 바 아니고!”라든가, “댁의 사정까지 봐 줘야 하나요?”라는 식의 발언에서 ‘댁’은 상대방을 직접 낮잡아 이르지는 않지만, 존대의 의미를 포함하지 않는다(https://brunch.co.kr/@mrj7b1u/219).

  ‘당신’이라는 말도, 존대의 뜻을 가지지만 어떤 맥락에서는 기분 나쁜 말로 받아들여진다. 한 사람의 기분이 몹시 안 좋은 상황이거나, 두 사람 모두 격한 상황이라면, “그건 당신이 잘못 생각한 거야”와 같은 평범한 문장조차 공격적인 의미로 들린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대체로 이렇게 말한다. “뭐, 댁? 지금 말 다 했어?” “뭐, 당신? 지금 싸우자는 거야?”


  결국 우리가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진지한 단어들에 정해진 모습 같은 건 없다. 일정한 의미를 갖는다면, 일정한 결과를 도출해야 마땅할 것만 같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모두 수만 가지 상황 중 하나를 붙잡아 놓은 기호에 불과하다. 그 기호를 실제 시간 속에 풀어놓았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중요하게 바라봐야 하는 것은 단어와 표현 자체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의 생각과 마음이 중요할 뿐이다. 은유적으로, 적어도 인간관계에서, 탱크를 타고 나타났다는 이유만으로 곧장 반격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정말 ‘탄’을 쏘았다면? 물론, 그때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사실, 이러한 발언은 지금까지 행동과 말이 전부이니, 그 이면을 살피려고 골몰하지 말라던 필자의 주장을 스스로 반박하고 있다. 예전에는 진짜가 무엇이냐를 판단할 때, 말과 행동이 진짜였으니 알 수 없는 마음과 생각은 짐작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이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늘어난 만큼,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오히려 버거워진 듯하다. 그래서 이제는 “말과 행동에 상처받지 마라, 그 사람의 진짜는 말과 행동이 아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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