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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May 26. 2023

인수인계

무엇을 얼마나 알려줘야 하는가라는 고민

  8월 말이면 계약이 종료되는 조교 한 분이 열심히 인수인계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십수 페이지가 되는 것 같았다. 아찔했다. 문득, 아내도 예전에 인수인계 내용을 확실하게 정리해 두고 퇴사했다는 말이 생각났다. 대충대충 일하는 나로서는 인수인계가 그렇게 중요한 건가 싶었지만, 아내가 들려준 경험담을 어렴풋이나마 떠올리면 성가시게 연락할 빌미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확실하게 해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수인계’라는 살벌한 말을 군대에서 처음 접했다. 처음 배운 것은 선임 신발 닦는 법, 청소하는 법 같은 것이었다. 당시에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이다. 정문 경비 근무를 할 때 외워야 할 자동차 번호판의 목록도 인수인계 내용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에 보면, 그 장면이 나오는데, 내가 경험했던 것보다는 순한 맛이지만 형식은 같다. 불침번 근무일지 쓰는 법도 배웠지만 자세한 건 아니었다. 근무일지라는 게 있고, 있었던 일을 쓰면 된다고 했다. 지침이 있었던 것 같다. 아무 일이 없었으면 어떤 표현을 쓰면 된다, 출동이나 훈련이 있었으면 어떻게 표현하면 된다. 이런 식의 지침이다.

  문제는 자세하지도 않았지만, 틀렸을 때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배우지 못했다거나 인수인계 없었다는 말은 선임의 책임을 묻는 발언이었고,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죄송하다는 말 자체도 허용되지 않았던 것 같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실제로 배운 대로 쓴 근무일지였는데, 누가 이딴 식으로 썼냐고 혼나기도 했다. 그렇게 고통을 겪으면서 적응하고 익히면서 이른바 선임이 되어 갔다.     


  사회에서 인수인계는 새로운 직원이 들어오면 회사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거나, 업무를 파악하기 위해 이루어진다. 이때 인수인계도 일종의 지침이 존재한다. 이때는 주로 업무의 종류와 연락처, 문서 작성 방법이나 보관 방법과 같은 말 그대로 기본적인 것들을 가르친다.

  그런데 인수인계를 잘했느냐 잘못했느냐를 두고 말이 나올 때가 있다. 신입사원이 업무를 잘 못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난다. 예컨대, “이봐요, 이거 설명 듣지 않았어요?”라고 물으면 “죄송합니다. 인수인계 내용이 없어서”라는 식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당연히 선배 직원을 향한 비난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퇴직한 사람이라면, 한동안 업무를 가르쳐주느라 시달려야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인수인계는 발생 가능한 모든 상황에 관한 대응 지침을 일일이, 자세히 전달하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업무 내용과 흐름 정도를 인지하도록 돕는 데에 그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같은 직장에서 같은 업무를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매 순간 똑같은 환경에서 업무를 처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회사 간부가 바뀌기도 하고, 그에 따라 경영 방침이 달라지기도 한다. 거래처의 담당자가 바뀌기도 하고, 그 담당자가 일하는 방식이 내가 일하는 방식과 달라지기도 한다. 따라서, 자신이 회사에 다닐 때 벌어졌던 일이, 신입사원에게도 똑같은 방식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직장에서 ‘인수인계 여부’를 따지는 일은 우발적인 사태에서 빈번히 발생한다. 이때, 신입사원은 인수인계를 못 받았다고 말하기에 앞서,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을 밟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선배 직원이나 상사들은 자신이 해당 업무를 수행할 때의 경험만을 앞세우며 그를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달라졌으면 업무를 해결하는 방법도 달라진다. 달라지지 않은 건, 결제 경로와 연계 부서 정도밖에 없다. 모든 것은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잘 가르쳐 주지도 않고 무작정 잘 해내라고 하는 건 부당해 보인다. 그러나 잘 가르친다는 것이 모든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아니기에 분별이 필요해 보인다. 내가 1년씩 계약을 하는 이 자리에 처음 왔을 때, 인수인계로 받은 건 A4 한 바닥 짜리 내용이었다. 그마저도 한 장이 가득한 것도 아니었다. 학기마다 진행하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식순만 적혀 있었다. 여백의 미가 돋보이는 그 종이를 받아 들고, 더 해주실 말 없냐고 물었다. 그냥 이게 다라고, 그냥 하면 된다고 했다. 황당했지만, 그냥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나중에 정말 그렇다고 인정했다. 물론, 나도 뒤에 합류한 분들께 제대로 인수인계하지 못했던 것 같아서 할 말은 없다.

  싸이월드 시절, 은사 님의 미니홈피에는 고기를 잡아 주기보다,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치기보다 고기 잡을 장소에 데려다주는 스승이라는 문구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잘 가르친다는 것은 못 하는 것을 대신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방법을 알려주되 스스로 성취하게 하는 것이고, 결국에는 가능성이 있는 장소에 데려다주고,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최고의 덕목임을 나타낸다고 이해했다. 나의 스승은 실제로 그런 분이셨고, 그런 모습을 닮고 싶었다. 그래서 비록 사이비에 머물렀지만, 그런 모습을 흉내 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문득, 나도 언젠가 인수인계를 해야 할 순간이 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그에 앞서 내가 맡은 일자리가 유지된다는 보장이 필요할 것 같다. 그래야 나 다음에 누군가가 나에게 인수인계를 요구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더라도 너무 자세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그 때문에 적응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게 나의 초지일관이다. 나머지는 닥치는 대로 겪어내는 수밖에 없다고. 물론 이런 내 생각조차, 완벽히, ‘꼰대같으숑’밖에는 안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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