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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Jun 02. 2023

"이런 식이면 곤란해"도 '이런 식'이기는 마찬가지

세상만사 만물에는 인연이 있다

  내가 투고한 논문을 나에게 심사해 달라는 이메일이 왔다. 편집업무를 맡은 분의 실수였단다. 해프닝이지만, 부정 탔다는 생각이 들었다. 떨어질 것을 알고 투고한 논문이었더라도 정말 떨어졌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은 없듯이 괜히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논문 투고를 처음 했을 때가 2013년인가? 스승님을 대신해 나를 챙겨주던 선배가 박사논문을 쓰기 전에 소논문을 쓰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래서 한 학회에 투고를 했는데, 당연히 고배를 마셨다. 박사과정에 있는 20대 남자애가 쓴 논문이라는 게 가당키나 한가. 심지어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도 거의 없는 지방대학이다 보니, 거대한 지식의 바다에서 공부하는 다른 대학원생들과는 질적으로도 비교할 수 없었을 거다. 그렇게 의기소침 한동안 소논문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예전에 쓰던 PC의 하드디스크는 나의 저장장치로 활용하고 있다. 그 안에는 떨어진 소논문, 쓰다 만 소논문이 한가득이다. 심기일전하면 된다, 칠전팔기하면 된다고 말하는 선배들이 많지만, 나는 그들을 다시 꺼내 읽어보지도 않고 있다.

  나의 어리석음은 몇몇 심사위원의 혹평이 이 세상 모든 이의 평가인 것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심기일전과 칠전팔기를 조언하는 선배들은 하나같이 너의 글이 인연을 만날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네 글은 그것을 인정해 주는 인연이 있는 곳에 자리 잡는다는 의미일 거다. 그렇다면 나는 글을 못 쓰는 사람, 그 주제에 관해서는 연구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나의 관점을 받아줄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일 뿐이다.

  나와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이지만, 건방지게 떠올려 본다. 발터 벤야민은 교수직을 얻기 위해 제출한 논문이 떨어져서 자리를 잡지 못했다. "아무리 읽어도 이해할 수 있는 의미를 집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벤야민은 거절당한 후 무안해하지 말고 교수 신청을 철회하라는 충고를 받았으며, 9월에 하릴없이 그 충고를 따랐다"라고 한다(수잔 벅 모스,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39쪽) 이미 집필할 때부터 많은 동료들이 조언하고 지적했다고 알고 있지만, 벤야민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기는 학자, 연구자라면 자신의 믿음과 철학을 내세우는 그 연구의 주제나 표현이나 관점을 바꾸는 게 쉽지는 않을 듯싶다.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사람을 사귈 때도 그렇고. 모두 자신의 관점과 생각으로 일하고 사람을 만나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 방식은 이상하다,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면 될까? 어떤 일을 부탁해 놓고, 자기 마음처럼 해 놓지 않았다고 핀잔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도대체 왜 나에게 부탁을 했는가 싶을 때가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런 식으로 일을 완성해 주세요, 이런 절차를 밟아서 일하시면 고맙겠어요라고 말하든지. 설령 그 핀잔이 조언이었다고 하더라도, 누구를 위한 조언일까. 자신의 조언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가, 그 사람이 자신을 더욱 의지하게 만들려는 것일까? 지배력 강화? 그럼, 그건 가스라이팅 아닌가. 


  과강을 조심하며, 유연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태어나자마자 얻은 사주풀이는, 네 성격대로 살다가는 큰일 난다는 의미일 것이다. 세상 사람 대부분이 좋아하지 않는 그 성격을 고치지 않고 살아간다면, 정말 외로울 테고, 외로움은 관계를 형성하지 못함을 뜻하니 당연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어질 터였다.

  그러니 과강을 조심하라. 그러나 과강을 너무 조심하려는 과강조차도 조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누군가 나에게 "너 그렇게 살면 큰일 난다"라고 말하는 건, 그 사람이 알고 있는 보편적인 세상의 관점으로 던지는 조언이 아닐까? 그 말에 일희일비하며 살아갈 필요가, 가치가 있을까 싶다.


  아무튼 이번 논문은 떨어질 것만 같다. 부정 탔다. 기왕 탔으니 더 좋은 곳으로 향해 나아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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