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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Jun 29. 2023

책임(責任)과 피임(避任)

  아내와 카페를 가던 길,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가는 걸 보면서 반가워하고 있는데, 횡단보도에 서 있던 노부부 중 할머님이 길에 온통 고양이 새끼라며 인상을 찌푸린다. 저건 또 검은 고양이라고 덧붙였다. 검은 고양이가 불길한 존재라고 여기는 터라 더 심한 반응을 보였던 것 같다.

  아내는 전날, 아들과 함께 걷다가 본 새끼 고양이 사체에 관해 이야기했다. 우리가 서 있는 횡단보도 가 치워졌다고 했다. 지금은 사체를 수거해 갔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나중에 카페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횡단보도에 다다랐을 때 여전히 보도블록 연석에 치워진 새끼 고양이 사체를 봤다. 비와 햇살을 번갈아 맞으며, 생전과 다를 바 없이 비참하게 떠나가고 있었다. 

  고양이가 많기는 많다.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몰라도, 버려진 고양이들도 열심히 생식활동을 하고 있다. 인간 사회에서 버려지고, 그럼에도 자신들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길고양이들이 그들을 버린 인간 사회의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게 어쩐지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영아 유기 사건으로 떠들썩하다. 냉장고며 변기,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던,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아기들로 우리는 충격을 받았다. 무라카미 류의 <코인로커 베이비>에서처럼, 기적처럼 살아남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복수라도 하기를 바라지만, 애초에 미숙아로 태어난 그들은 그런 기적을 기대하기도 힘들었을 터다. 버려져 죽었다는 사실만큼이나, 제대로 먹지도 자라지도 못한 채 빠져나왔을 그들이 더욱 안타깝다. 그렇다고 산모에게 분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권리는 없으니까.

  누군가는 예의 할머님처럼, 사건 속 산모들이 무책임하게 아이를 갖고 출산했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다면 피임을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아니, 애초에 어린 나이에 무슨 사랑이냐. 장난처럼 즐긴 섹스가 끔찍한 사고를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런 부분이 없지 않겠으나,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확실하다.

  청소년 성교육에 관한 이야기가 벌써 20년 넘게 이야기되었음에도 나아진 것이 없고,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에 관한 책임이 여전히 여성에게 전가되는 사회에서, 사랑했지만 원하지 않았던 임신이나, 누군가의 폭력으로 생긴 아이는, 타인의 곱지 않은 시선과 이것이 주홍글씨가 되어 평생을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는 공포감에 키우고 싶어도 지우고 싶어도 절망감만 안겨줄 수밖에 없어 보인다.


  OECD 국가 중 꼴찌 수준의 출산율. 올해는 0.81명이라는 뉴스를 보면서도 여전히 임신과 출산, 육아를 행복한 일로만 여길 수 있는 사회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15년간 발의되어 왔지만 제대로 된 논의조차 없었다던 출생통보제(동아일보 https://naver.me/5bdi1lXw)가 법사위 통과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란다. 출생통보제는 출생신고 의무를 부모 당사자에게만 주는 것이 아니라, 지자체와 의료기관 모두에 부여하는 법이다. 누락되는 출생을 줄이고, 출산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영아유기를 막아내겠다는 취지란다(연합뉴스 https://naver.me/x6UGd9bf)

  문제가 되는 것은 보호출산제. 보호출산제는 영아유기의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인, '두려움'과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익명으로 출산할 권리를 준다는 것인데, 이를 두고는 오히려 아이들을 버리는 일이 늘어나게 만드는 일일 수 있다는 지적이 생기고 있다(오마이뉴스 기사 https://omn.kr/1updl 참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청소년이 책임과 피임에 관한 교육을 제대로 받아야 하고, 성범죄에 관한 강력한 처벌과 피해 여성을 향한 전폭적인 지원(지지를 포함한)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청소년에게 책임과 피임을 가르치는 것은 애초에 성범죄나 놀이처럼 즐기는 섹스를 막고, 사회 구성원 일부가 그토록 싫어하는 임신중절을 줄이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대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피해에 관해서는 국민들의 지지(사생활을 파헤치는 관심이 아니다)와 국가의 지원으로 편견과 차별 없이 아이를 지우거나 혹은 기르기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론, 그 방법 중 하나로서 보호출산제가 거론되는 것이겠으나, 앞의 기사문에서 쓴 것처럼, 그것은 '아이(인구)'만 원하는 태도가 반영된 듯하다. 다양한 방식의 지원이 있을 수 있는데, 여성들이 원하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을 수 있는데, 그 다양한 삶의 권리를 다양하게 보장해 주는 대신,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국가가 어떻게 그들을 지원하겠다, 보호하겠다, 사회문화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가겠다는 건 없이, 당신 이름을 밝히지 않고 아이를 낳을 수 있으니 당신도 자유롭고, 아이는 곧바로 입양될 수 있으니 당신도 아이도 국가도 모두 좋은 일이 아니냐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말이다.


  생명은 두렵다. 곤충이나 지렁이가 두려운 이유는 그것이 흉물스럽게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강렬한 생의 의지 때문이기도 하다. 커다란 지렁이를 손가락으로 건드려 보라. 미친 듯이 꿈틀거리며 달아나려고 하는 그 움직임, 그 감촉이 두렵다.

  임신과 출산 이야기만 나오면, 우리는 두 가지만 본다. 아이를 죽일 권리와 아이를 살릴 의무. 아이를 살릴 의무를 따르고 나서 누릴 수 있는 권리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아이를 죽일 권리를 누리고 나서 지켜야 할 의무에 관해서도 충분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실, 오직 '나' 자신과 '국가'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어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럴 때 우리가 원하는 좋은 미래는 오지 않을 것 같아서다. 권리에는 책임이 따르고, 의무를 부여할 때는 의무를 이행한 자들을 위한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15년 동안 한 가지 법조차 제대로 논의하지 못했다는 게 한심할 뿐이다. 15년 동안 15개 아니, 10개의 법안을 논의하고 통과시키는 국가, 국민의 다양한 권리와 의무를 제대로 설정해 주는 국가가, 나로서는 절실하다는 말이다. 잠이 덜 깼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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