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이미 그녀가 조사관들을 찾아가서 하소연을 한 이후였다. 두 사람이 같이 찾아왔는데,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든 심정은.. '이 사건은 끝났다.'였다.
이 건 명의신탁사건에서 그녀가 이기려면, 명의신탁이 없었음을 증명해야 했다. 즉, "나는 몰랐다. 명의를 도용당했다."라고 주장하고 이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미 그녀는 "알고 있었다" "도와주었다"로 진술하고 진술서에 서명도 해 버렸다.
"무엇인가가 없었다. 하지 않았다. 몰랐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있었다. 했다. 알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수십 배는 더 힘들다. 사실, 증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그런데, "알았다"는 진술마저 과세당국이 가지고 있으니, 참으로 난감했다.
명의도용을 증명할 수 없다면, 명의신탁의 대상인 주식의 세법상 평가액을 가지고 다투어서 증여세를 낮추거나 없애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이 사건은 그것도 불가능했다.
사장님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 사건은 힘들겠다고.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그녀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위에서 써 놓았던 그녀의 개인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자신의 이름도 모르는 장애인 여동생, 더 이상 경제활동이 불가능한 부모님, 월 300만원으로 이들을 부양해야 하고, 결혼은 꿈도 꾸기 힘든 자신의 처지.. 처음에는 담담하게 들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전까지는. 그런데, 그녀의 눈물을 보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계속 찜찜했던 질문을 했다. 매우 담백한 어조로.
"두 분, 연인이세요?"
솔직히, 이 두 남녀가 처음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기분이 별로였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 보이긴 했지만, 혹시 내연관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물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요. 생각 못해 봤어요."
옆에 있던 사장님도 "그러네." 하고는 실소를 머금었다.
"사모님 하고도 잘 알아요. 사모님과는 통화도 자주 해요."
"네, 알겠습니다. 같이 한번 연구해 보시죠."
속으로는 그 질문이 미안했지만, 미안하다거나 하는 식의 말은 하지 못했다.
만남 (2)
며칠 후 사무실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과세전적부심사 일정이 잡혔기 때문이었다.
이 글 (4/4) 6번 설명 참조
그녀에게 동생의 일상생활을 사진으로 찍어 올 수 있겠냐고 물었다. 부모님도 함께 찍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진 찍는 대형으로 서 있는 것 말고, 일상의 모습을 최대한 많이 담아 달라고 했다. 그녀는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했다. 나는 14억 원의 세금이 부과되고 나면 당신과 당신 가족이 어떤 상황이 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가 보는 앞에서 지방에 가 있는 그 사장님에게 전화했다. 그녀가 당신을 명의도용으로 고소를 하게 할 생각인데, 그래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늦긴 했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좋을 것이라고 설득했고, 사장님의 동의를 얻었다.
나는 그녀에게 사진 찍는 것과 고소하는 것 두 가지의 일을 부탁하고는 돌려보냈다.
이 사건은 법리 싸움으로 끌고 가서는 답이 없는 사건이었다. 당신이 예상하는 대로 나는 감정에 호소하기로 마음먹었고, 그에 대한 밑밥을 준비했다.
하지만, 많이 부족했다. 이 정도로는 이길 수 없다. 조금 더 뭔가를 찾아내야 했다.
화장실
정말 근심을 푸는 장소(해우소)가 맞나 보다
나는 화장실에 갈 때 뭔가 읽을거리를 들고 가는 습관이 있다.
그날은 변기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던 내 손에 그 사건의 주식 양수도 계약서가 들려 있었다. 무슨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고, 갑자기 급해져서 손에 쥐고 있던걸 그대로 들고 갔었다.
달랑 한 장짜리 성의 없는 계약서. 제일 아래에 있는 계약자의 이름 "김순영" 그리고 서명. 제기랄. 몇 번을 봐도 변하지 않는 이름.
그리고, 서명..... 서명?
왜?
그런데, 계약서의 옆 가장자리에 간인이 눈에 띄었다. 두 개의 도장.
이름 옆에는 손으로 서명을 해 놓고, 간인을?
그것도 도장으로?
왜?
도장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있던 터라 딱히 볼만한 다른 서류도 없었다. 간인을 찍을 때, 딱 반반으로 나눠서 찍었으면 좋았으련만, 내가 가지고 있는 계약서는 삼분의 일 정도만 찍혀있는 쪽이었다. 저쪽 계약서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여하튼, 한문으로 된 두 개의 도장 중 하나는 성이 최씨인 것 같았다. 일단 최씨로 우기면 믿어 줄 만해 보였다. 나머지 하나는 이것도 많이 애매하긴 했지만, 이름 끝자리가 김순영의 "영"이 아닌 다른 글자인 것 같았다. 내가 아는 "영"자 중에는 이런 식의 귀탱이가 나올 수 있는 한자는 없었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행동개시
급하게 뒤처리를 하고, 내 방으로 달려갔다. 노트북으로 한자 "영"자를 뒤졌다. 네이버에도 찾아보고, MS 워드로 한글 "영"자를 쳐서 한자로 변환시켜도 보았다. 도장의 글자가 온전하지 않았기에 좌우로 위아래로 잘라보면서 한 글자씩 확인했다.
없다!
도장귀퉁이에 남아있는 글자 조각과비슷하게 생긴 한자 "영"자는 없었다. 그녀의 도장이 아니라고 우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에게 전화했다.
20XX년에 서명을 한 문서가 혹시 있냐고 물었다. 당연히 없었다. 일기 쓰냐고 물었다. 안 쓴다고 했다. 문득 통장이 생각났다. 당시에도 이미 도장대신 서명으로 통장을 만들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녀에게 서명으로 만든 통장이 있냐고 물었다. 있다고 했다. 20XX년에 사용하던 통장을 찾아보고 서명을 했으면 사진 찍어서 보내라고 했다. 하나만 보내지 말고, 20XX년 언저리에 사용했던 통장은 모두 다 찍어서 보내라고 했다.
1시간쯤 지나서 사진을 전송받았다.
그런데, 이런 XX.
계약서의 서명도 한글로 "김"
통장의 서명들도 모조리 한글로 "김"
분명 좀 달라 보이긴 한데..
다르다고 주장하면 믿어줄까?
그냥 서명을 풀네임으로 해서 다시 보내 달라고 할까?
20XX년에 사용했다는 시간적인 일치성, 그리고 통장이라는 뭔가 공적인 냄새가 나는 물건, 이런 것들이 주는 신뢰감과는 차이가 너무 클 텐데..
결국 20XX년의 통장으로 밀고 가기로 결정했다.
그 다음..
인터넷으로 필적감정소를 검색했다.
통장 세 개에 글자 세 개, 계약서에 글자 한 개.
"글자들이 같은 사람 것인지 아닌지 감정해 주시나요?"라는 식으로 묻지 않았다.
"(김)이라는 글자가 네 개 있는데, (김) ABC 세 개는 한 사람이 썼고 (김) D는 다른 사람이 쓴 겁니다. 이 점을 확인해서 감정서를 발행해 줄 수 있나요?"라는 식으로 물었다.
글자가 한 글자뿐이라서 감정하기 힘들다는 답이 많았다. "제가 육안으로 봐도 ABC는 필체가 같고 D는 확실히 달라요. 누가 봐도 확연히 구분됩니다. 그냥 감정서가 필요해서 감정해 줄 곳 찾는 거예요."라는 말로 설득했다. "확연히"까지는 자신이 없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말했다.
어디 쓸 거냐고 묻는 곳이 있어서, 그런 것도 말씀드려야 하나요? 그러면 다른 곳에 알아볼께요. 라는 말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식으로, 내가 원하는 감정서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이 주는 세 군데의 감정소를 선정해서 의뢰했다. ABC는 묶어서 D는 따로. 구분하기 쉽도록 표시를 해서 캡처한 글자들을 보냈다.
필적감정은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 봤기에 저런 나의 노력이 효과가 있는 것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내 눈에는 달라 보였고, 감정을 해도 그런 결론이 나리라 기대도 했지만, 혹시라도 같다는 결론이 나올까 걱정되어서 최선을 다해 감정소에게 암시를 주었다.
사실, 과세당국이 확실한 증거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달랑 계약서 한 장에 도장이 어떻고 서명의 필적이 어떻고 하는 주장만으로는 이기기가 쉽지 않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 사건의 경우는, 김순영씨 이름이 들어가 있는 주주명부도 있고, 통장거래내역도 있고, 무엇보다도 김순영씨가 명의신탁 관련한 일련의 사실을 본인이 다 알고 있었고 계좌이체 등을 도와주었다는 진술서가 과세당국에게 들어가 있는 상태이기에 더욱 힘들다.
사장님을 고소한 시기도 너무 늦었다. 고소일자가 세무조사 때도 아니고 과세예고통지가 나온 후이기 때문에 누가 봐도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준비가 반드시 매력적인 밑밥이 되어 줄 것이라 믿고 싶었다.
만남 (3) - 편지
심장을 찌를 수 있는 두 자루의 비수
과세전적부심사 일자 이틀 전, 그녀를 사무실에서 만났다. 내가 무엇을 준비하고 어떤 전략으로 임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편지를 써 보라고 했다. 심사위원회를 할 때 나와 같이 들어갈 것인데, 그 자리에서 심사위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써 보라고 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당신의 현재 처지와 심경에 대해서 이웃 오빠나 언니에게 하소연한다고 생각하고 편지 형식으로 써 보라는 주문을 했다.
명의신탁으로 연결 지울 수 있는 20XX년에 있었던 몇 가지의 일들을 알려주면서, 그 이야기는 빼고 아무 이야기든 하고 싶은 말을 써 오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그다음 날 편지를 다 썼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보여달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어제 이야기했던 들어가면 곤란한 내용을 다시 상기시켜 주면서, 그런 내용이 없는지 확인만 했다. 내가 편지를 보게 되면, 나의 말투로 나의 언어로 고쳐 쓰고 싶을 것이 분명하기에 보고 싶은 것을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