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드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고
살면서 우리는 여러번 사랑을 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계속해서 사랑하고 싶어한다. 대학에 가면 연애를 할 거라 꿈꾸고, 나이가 찬 솔로들은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다시 한 번 불타오를 것을 갈망한다. 사랑은 신이 세운 절대 명제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다. 사랑을 꼭 해야만 해? 라며 비판적으로 보고 싶지는 않다. 사랑은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 단순한 일이 아니다. 그 누구보다 견고히 쌓아 올렸을 각자가 부딪히는 일이기에 우리는 언제나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계산한 몇 만분의 일의 확률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게 된다.
바로 이런 사랑의 판타지적 속성은 우리가 경험하기 힘든 감정의 고양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고저 차가 너무 큰 이 감정은 사람을 크게 변화시킨다. 미친 사람처럼 들뜨게 하기도, 그러다 고꾸라져서 우울에 빠지게도 한다. 하지만 사랑을 위해 이별은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이 대목에서 지속 가능한 사랑이 있는걸까 하는 고민이 든다. 어떤 다툼이나 유혹이 찾아오거나 지루함이 찾아오지 않을까, 그래서 꿈만 같던 순간들을 순식간에 폐기처분해야 하는 건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든다.
하지만 어쩌면 그 두려움이라는 감정 - 이별의 가능성에 대한 - 이 서로를 더 끌어당기도록 노력하게 만드는 원동력일지도 모르겠다. 서로가 언제든 이별할 수 있는, 분리된 존재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 때 나는 너를, 너는 나를 더욱 자세히 보고 기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이다. 클로이는 누구말마따나 썅년이 아니다. 클로이와 그는 이별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고 사랑하다 때를 놓쳐버린 것 뿐이다.
이쯤되면 마치 그는 그녀를 진짜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모습'을 더 사랑했던 것 같다. 만약 그가 자신보다 상대의 감정에 집중했으면 어땠을까. 그가 그녀를 당연하게 생각하며, 자신의 사랑이 최선이라 생각하며 취해있을 때 지친 한쪽은 떠난 것이다. 다만 그녀의 몸이 조금 더 빨리 솔직하게 반응했을 뿐이다. 그런 사랑도 있는 거니까 괜찮다. 클로이와 그가 보여줬던 시작과 끝. 그리고 다시 반복되는 사랑이야기. 지금 우리는 그 가운데 어디 쯤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