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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이두씨 Aug 03. 2022

#20. 다시 돌아온 6월의 날들

2022년 6월 1~24일

6월의 날씨는 1년이 지난 2022년에도 여전히 좋았다.


6월 2일이 되어 서울에 올라가기로 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서울 본가의 방문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6월 초 서울행에서의 나의 일정은 6월 2~3일에 서울 본가에서 어머니, 동생과 함께 하루를 보내고, 3~5일에는 서울에 뒤늦게 올라오는 아내, 아이들과 같이 여행을 다니는 일정을 계획했다.


전날인 6월 1일에는 지방선거가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그 지방선거에서 선거권을 부여받으셨다.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전체 국민의 선거인명부를 등재하는 시기에 아버지는 '행정적'으로 살아계셨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사망선고가 5월 말에 이루어지는 바람에, 서울 본가에는 아버지의 성함도 포함된 지방선거 용지가 날아들었다. 뒤늦게 아버지의 성함이 포함된 서류를 보시고 어머니는 마치 아버지가 곁에 계신 듯 착각하셨을지 모를 일이다. 아마 살아계셨다면 선거에 참여하셨을 것이고 보수당인 여당의 승리로 끝난 그 선거를 흡족하게 바라보셨을 것이지만, 결국 아버지는 '50.9%'라는 지방선거 투표율 자체에도 도움을 주진 못하셨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서울 본가의 모습. 유품까지 일부 정리가 된 이후라 아버지의 흔적은 군데군데 걸려있는 몇 장의 '사진'에서 밖에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사진 찍는 것을 참 좋아하셨다. 덕분에 서울 본가에는 꽤 많은 사진이 여기저기 놓여있었다. 거실 벽을 비롯한 각 방의 벽은 기본이요, 집안 곳곳에 사진을 꼽을 수 있는 빈틈이 있는 자리에는 다양한 사진이 빼곡히 자리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사진부터 시작해 아버지, 어머니, 나, 동생의 사진을 한 바퀴 지나면 며느리와 두 손녀로 이어지는 가족사진이 이어졌다. 이런 사진들이 집안 곳곳 어느 위치에서든 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 이 집 사람들의 사진사랑을 짐작할만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어머니는 내가 집을 방문했던 그날에 몇 백장에 달하는 사진 뭉텅이를 내미시면서 이 사진들을 '정리'하고 싶으시다고 하셨다. 나는 그 많은 사진을 정리하고자 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정리하시려고?"

"집에 사진이 많기도 하고... 나까지 죽으면 이거 다 누가 처리하니? 미리 버릴 것들은 버려야지."     


아...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시면서 어머니는 또 다른 준비도 필요하다 생각하셨을까? 그래서 본인 선에서 정리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생각하셨을까? 이 역시 언젠가 다가올 현실이겠지만, 차마 생각하고 싶지도,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 그 무엇이었다.



...(중략)...



"올라가 보자!"


아내는 앞을 알 수 없는 길을 차로 오르는 게 상당히 불안해 보였지만, 남편의 간절한 마음을 이해했는지 차마 거부하진 못했다. 스마트폰의 지도 어플에 찍히는 내 위치와 납골묘의 위치를 비교해 가면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 또 다른 코스의 입구에 다다를 때는 그나마 수월했다. 이윽고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조금씩 불안해졌다. 우리가 과연 맞게 가고 있는지를 모르는 불안감에서 시작해, 점차 높이가 더해져 가면서 아무런 포장도 되어 있지 않은 깎아지른 경사면을 오를 때는 그 불안감이 더욱 커져있었다. 한참 그렇게 산을 오르고 나니, 차량의 오른편에는 '고라니'가 뛰어다니고 있었고, 왼편으로는 혹여나 운전을 잘못하기라도 하면 굴러 떨어질 수 있는 '낭떠러지'가 연출되는 매우 살벌한 경험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발아래로 펼쳐지는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묘한 경험도 함께 할 수 있었다.


차량 오른편으로 내려다 보이는 풍경

그렇게 20분 이상을 한참 산을 넘고 나서야 우리는 드디어 아버지의 납골묘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험난한 과정을 겪고 나서 납골묘에 도착하고 나니, 가볍게 생각했던 이곳의 방문이 내게 주는 의미가 더 커져 있는 느낌이었다. 49재의 날이었지만, 그런 것 자체는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시간이 적잖이 지체된 만큼 빠르게 49재를 준비했다. 대나무 돗자리를 깔고, 향에 불을 붙인 뒤, 아버지에게 정종 한잔과 오징어포를 올려드렸다. 나는 간단하게 이배를 올리고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우리는 잘 살아 볼 테니까, 이제... 하늘에서 편히 쉬세요. "


그렇게 인사를 건네고 10여분 정도 그곳을 거닐면서 시간을 보냈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시간이 한참 흘러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의 하원 시간을 맞추려면 빠르게 돌아가야 했다. 그 짧은 만남 뒤에 우리는 다시 산을 넘어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들어갔던 길의 역순으로 우리는 다시 산을 넘었다.


한번 넘어온 길이었기 때문에, 돌아가는 길은 마음이 한결 편해져 있었다. 날씨는 아침보다 더욱 좋아져 있었다. 먹구름이 군데군데 있었지만 마치 아버지의 슬픈 영혼을 달래듯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집에 가까워 올수록 날씨가 한결 쾌청해지는 것 같았다. 햇살도 덩달아 뜨거워진 듯했다.


"날이... 좋네."


6월의 여느 날과는 다를지 몰랐다. 1년 전 그때처럼 햇살이 촤라락 대지를 때리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먹구름을 몰아낸 그날의 햇살은 느낌이 좋았다. 그게 진짜 좋았던 것인지 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1년 전 6월과 올해 6월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우리는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날의 그 변덕스러운 날씨는 우리가 1년간 보내온 고통과 애환을 담아내기도 하고, 앞으로의 삶을 응원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마치 하늘에서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듯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2년이 흐른 뒤에, 지금에서야 이 글을 엮어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드립니다.

https://bookk.co.kr/bookStore/66332918fc0d5301c78a2ed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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