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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이두씨 Aug 01. 2022

#19. 정리해야 하지만, 정리할 수 없는 것들

2022년 5월 12~30일

우리는 뜨거운 이별을 정리하고, 현실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빈자리와는 다르게 우리가 느끼는 아버지의 추억은 너무 컸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 했던가?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망자는 빈손으로 간다. 하지만, 그가 생전 머물렀던 자리에는 그 사람의 것으로 가득하다.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공수래만수거'(空手來滿手去)가 더 들어맞는다. 우리가 우리의 현실을 살기 위해서는 그 '만수거'를 정리해야 했다.


아버지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는 여러 복잡한 과정이 필요했다. 사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들 이겠지만,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정리였다.      


서울 본가의 집은 항상 무언가로 가득 들어찬 일종의  '멕시멀리스트'(Maximalist)의 집과 같았다. 나도 결혼 후 분가하기 전까지는 그 삶에 꽤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잡화를 가득 품은 그 집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런 집을 갖게 된 이유에는 우리 가족 모두가 일정 부분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 또한 적잖은 지분을 보유하셨었다.     


아버지는 무엇인가를 자주 사지도 않으셨지만, 쉬이 버리지도 못하셨다. 아마도 풍족하지 못하셨던 어린 시절에 대한 영향이 아닐까 생각된다. 덕분에 아버지가 머무르셨던 서울 본가에는 아버지의 물건이 구석구석을 메우고 있었다. 당장 집에 다시 들어오셔서 그대로 쓰실 것 같은 물건들. 그 물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남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좋을 리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서울본가에 남게 된 사람들. 그리고, 아버지의 '유품'으로 불리는 것들. 그들에게 그것들은 버려야 하지만, 차마 마음 아파 버릴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한낱 쓰레기 같이 별것 아닌 것들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함부로 버리기 어려웠지만, 아버지와의 추억에 마음이 아플수록 '역설적'으로 그 흔적을 정리해야만 했다. 그렇게 서울 본가의 어머니와 동생은 아버지의 흔적이 가득한 집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 수많은 유품 중 가장 눈에 띄는 것들은 아버지의 손때가 뭍은 '옷가지'들이었다. 옷이야 한낱 천으로 만들어진 의류에 불과했지만, 그 옷가지를 보면 마치 '가상현실'과 같이 아버지의 착장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일종의 '조건 반사적' 사고였다. '저 바지는 저렇게 입으셨었지.', '저 티를 입으면 저렇게 보였었어.'와 같은 상상의 나래는 남은 자들에게 추억을 넘어 고통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당장 마지막에 병원으로 가시면서 침대 옆에 벗어두신 아버지의 옷가지를 보는 어머니와 동생의 심정은 나로서도 차마 짐작키 어려웠다. 아마도 그 옷을 보고 꽤나 많은 눈물을 흘리셨을게다.


...(중략)...


사실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우선 처리해야 하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복잡한 '행정처리'였다. 직계가족이 사망한 경우를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일단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은 아버지의 '개인재산에 대한 처리'와 '유산상속' 등등이 떠올랐다. 하지만, 우리 모두 그 행정처리를 위해 우선적으로 아버지에 대한 '사망신고'를 해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고인에 대한 사망신고는 행정적으로 사망날 이후 '한 달' 안에 처리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과태료'가 부과된다. 정부에서는 행정적으로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그 '한 달'로 제약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별것 아닌 그 '신고'는 말처럼 그리 쉽지 않았다. 나는 세종에 있었고, 동생은 매일 출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망신고는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행정적인 사망신고를 썩 어려워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머리로는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다.     


아버지의 유품이 일부 정리된 이후인 5월 18일에 어머니는 그 사망신고를 하려고 '시도' 하셨다. 사망신고를 위해 사망 당일 내가 그 불친절한 아저씨로부터 발부받았던 '사망진단서'를 들고 동사무소 앞에 가셨다.


아버지의 사망진단서

하지만, 어머니는 차마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걸음을 돌려 집으로 다시 돌아오셨다. 사망신고에 실패하신 어머니와의 전화통화에서 어머니가 이야기하셨다.     


"도저히 못하겠어... 언제쯤이면... 괜찮아질까?"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또 눈이 붉어졌다. 어머니께서 그 서류를 동사무소에 내미는 그 단순한 행위가 스스로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일종의 '인정'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나도 담담한 척했지만 어머니의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중에 나랑 같이 가요... 내가 조만간 올라갈게..."     


...(중략)...

     

어머니와의 전화를 헐레벌떡 끊고 오랜만에 나도 눈이 벌게지도록 눈물을 흘렸다. 세종의 아무도 없는 조용한 거실의 소파에 앉아 나도 그렇게 한참을 홀로 펑펑 울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0일이 지난 5월 27일, 아버지는 드디어 행정적으로도 ‘고인’이 되셨다.


...     


어머니가 사시는 서울 강북구의 미아동 인근에는 '오패산'이라는 야트막한 뒷산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어머니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그곳을 매일 한 번씩 오르셨다고 했다.     


사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도, 나의 눈앞 일상은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맛난 커피와 식사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마음 한편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는 것을 제외하면 나는 그대로 세종에서 아내와 두 딸과 여전히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적어도 외연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부분의 시간을 멀쩡하게 보내면서, 가끔씩 튀어나오는 헛헛함을 감내하는 어려움만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상황은 나와 달랐다. 어머니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어버렸다. 아침에 일어나도, 매번 식사를 할 때마다, 거실에서 TV를 볼 때도, 길을 걸을 때도 항상 옆에 있던 어머니의 '짝'은 이제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매 순간이 괴롭고 고통스러웠다고 하셨다. 특히 저녁시간에 그 헛헛함이 더 커지는 듯했다. 밤에 잠에 들기 어려워하신 어머니는 병원에서 제조해준 '수면제'를 조금씩 복용하셨다. 효과가 얼마나 좋은지, 어머니는 수면제를 복용하신 날이면 하루 종일 몽롱하다면서도 당장은 그 수면제를 아예 끊지는 못하셨다. 수면제의 작용은 누리면서도 반작용은 경감시키고 싶으셨는지, 그 조그만 수면제를 반으로 쪼개 드시면서 말 그대로 현실을 '버티고' 계셨다.   


그래서 잠시나마 그 고통을 잊기 위해 동네의 뒷산을 쉬지 않고 오르셨다. 5월 27일, 아버지의 사망신고를 한 그날 오후에도 어머니는 그 산을 다시 오르시면서 마음을 추스르셨다.



(표지 사진출처: 대한민국법원 전자민원센터)




아버지가 돌아가신 2년이 흐른 뒤에, 지금에서야 이 글을 엮어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드립니다.

https://bookk.co.kr/bookStore/66332918fc0d5301c78a2ed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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