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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이두씨 May 27. 2022

#2. 스피노자와 사과나무

2021년 6월 14~16일

조용한 연구실 창밖으로 금강이 비단처럼 흐르고 있었다.


"아니 사태가 이렇게 되도록 뭐 하셨어!!"


전날 전화통화로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나서, 나는 전화기를 붙들고 죄 없는 어머니를 질책했다. 아버지가 그 상태가 되도록 왜 병원에 모시고 가지 않았냐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어머니는 예의 그 담담한 말투로 이야기하셨다.


"얘, 너네 아빠가 내 말 듣니?"


아버지가 우리들의 이야기를 그리 쉽게 듣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어머니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답답한 심정에 나온 말들이었다.


아버지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뒤의 상황은 예상보다  답답하게 흘러갔다. 처음 전화통화를 한 날은 토요일이었고, 다음날은 일요일이었는데, 일요일에 집 근처 동네병원은 외래진료가 불가했고 응급진료만 가능한 상황이었다. 우리에겐 그 상황이 '응급'이었지만, 평소 병원 방문을 등한시하셨던 아버지 입장에서는 '다음 날'이라는 좋은 핑계가 있었다. 다음날인 14일 월요일에 동네 병원을 찾은 아버지는 더 큰 병원을 찾아가 보라는 이야기를 들으셨고, 사시는 곳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비교적 가까운 B대학병원을 찾으셨다. 어렵게 찾은 대학병원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해 입원을 하려면 PCR 검사 음성 확인이 필요하다고 아버지를 집으로 돌려보냈고, PCR 검사가 통상 하루가 걸리는 통에 아버지의 대학병원 입원은 하루 더 미뤄졌다.  


이 답답한 상황을 전해 들은 월요일에 나는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와의 통화에서 아버지의 입원 연기 소식을 듣고 내가 재차 반문했다.  


"그래서 아빠는 지금 뭐하셔요?"
"일 가셨어."
"일?... 아니 어떻게 일을 가실 수가 있어?"


14일 월요일에 입원을 하지 못하게 되자 아버지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일을 하셨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일을 하셨다.' 아버지뿐만이 아니다. 어머니와의 통화 중 수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드르륵' 미싱 소리에 어머니도 일을 하고 계신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고 이 미련한 분들아...'




일밖에 모르는 미련한 아버지. 1952년 음력 5월생. 2021년 6월 기준 한국 통용 나이 칠십, 생일 전이므로 법적 나이 예순여덟. 160cm, 60kg 후반대의 딴딴한 체격을 가지신 배 나온 작은 아저씨.  


충청북도 청원군(현 청주시)에서 9남매의 일곱째로 태어나셨다. 딸, 딸, 딸, 딸 내리 네명의 딸을 낳으신 할머니가 다섯째로 아들을 낳으셨는데 이분은 내겐 큰 아버지가 되셨다. 예전 분들이 그렇듯, 할머니는 첫째 아들에 대한 보험(?)으로 아들 하나를 더 원하셨는데, 기대와 다르게 다시 딸을 낳으셨고, 그 뒤에 우리 아버지가 이 자손 많은 가문에 일곱째로 태어나셨다. 할머니는 뒤이어 딸을 둘 더 낳으셨으니, 총 9남매라는 대 가족을 이루는 데 성공하셨다.


당시 우리나라 평범한 가족의 상당수가 그러하듯이 넉넉하지 않았던 가정형편으로 아버지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셨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당시 국민학교를 졸업하시고 혈혈단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셨다고 했다. 어려운 집안 사정을 어릴 때부터 느끼셔서 제 밥벌이는 제 손으로 하고 싶으셨고, 그러기엔 지방보다 서울이 기회가 많을 거라 생각하셨다고 했다. 구두닦이며, 신문 돌리기 등등 안 해본 일이 없으셨는데, 30대에 이르러 동네에 있던 K섬유업체에 취업하셔서 번듯한 직업을 갖게 되셨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닐 때 즈음인가? 그 K섬유업체의 부장까지 되셨으니, 나름 가진 거 하나 없이 본인의 삶을 하나씩 채워나가셨다.


정확히 언제쯤 섬유업체를 퇴사하셨는지는 기억에 없는데, 대략 아버지가 40대 즈음에는 섬유원단을 떼다가 특정 업체에 품을 하시는 개인사업을 하셨던 것 같다. 그 당시 우리 집에는 각양각색의 원단들이 둥그렇게 말린 '원단 전봇대'들이 집안 곳곳에 쌓여있었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시기인 1990년대에는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섬유업계에서 나오셔서 인생 후반부를 대비하는 일거리를 찾으셨다. 아버지는 손재주가 매우 좋으셨기 때문에 밥벌이가 되는 '기술'을 배우고 싶어 하셨다. 기존의 섬유업계 쪽 일은 섬유를 만드는 것보다는 중개상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본격적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제조업'에 뛰어들고 싶으셨던 것 같다.


이 기간 동안 구두수선, 지갑 제작 등 다양한 일을 배우시려고 노력하셨다. 다양한 시도 끝에, 아버지는 40대 후반 즈음에 '타일'을 배우셨다. 맞다. 주방, 화장실에 붙이는 그 타일 말이다. 느지막이 배우신 타일 기술에 대한 자부심은 아버지의 벌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분가하기 전에도 매번 거나하게 술이 취하시면, 본인의 일당에 상당한 만족감을 드러내곤 하셨다.


"넌 얼마 버니? 난 하루 일 가면, 20만 원 이상씩은 벌어. 한 달이면 500은 넘지~"
"많이 벌어서 좋겠어요~"


가끔씩은 저렇게 장단 맞춰드리면 좋다 하셨다. 적어도 벌이 앞에서는 순수한 면을 자주 드러내곤 하셨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집에서 너무 놀고 있었던 어느 날에는 아들이 한심하게 보이셨던지, 아버지는 내게 이야기하셨다.


"집에서 놀고만 있을 거면, 아빠랑 같이 일가는 건 어때? 아르바이트비 줄게."


'오잉? 아르바이트비를 주신다고? 이건 빠질 수 없지!' 아버지를 따라가 2~3일 정도 같이 일을 했던 것 같다. 내가 한 일이라곤 모래나 시멘트를 날라드리고, 널빤지를 치우고 하는 소위 '대모도'('조력공'을 뜻하는 일본말)의 역할이었는데, 일이 다 마무리되고 5만 원 정도의 보상을 해주셨다. 내가 아르바이트비를 들고 무엇을 했는지 아나? 그 일당을 들고 당시 청계천변에 있는 헌책방에 가서 'EBS 문제집'을 전권 구매했고,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여름방학 동안 나는 매일 '153 볼펜'을 하나씩 써가며 그 문제집을 다 풀었다. 덕분에 여름방학이 끝나자마자 치른 수능 모의고사에서 전교 10등 안에 들었으니, 내 고등학교 시절 공부의 절반 이상은 이때 다 한 것 같았다. 당시에는 이렇게 힘들게 일해서 번 돈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고, 열심히 공부하면 그 힘든 일을 다시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아버지는 아들 쓰는 재미가 쏠쏠하셨는지 몇 번이나 기술배울 것을 종용하셨고, 나는 그때마다, 발끈하며 대꾸했었다.


"그냥 공부 적당히 할 거면, 아빠 따라가서 기술이나 배워."
"아들을 하나 더 낳았어야 했는데. 기술 가르치려면, 그렇죠?"


타일업은 흔히 말하는 월급쟁이와 달리 평일에 출근하고, 주말에 노는 직업이 아니다. 일이 있을 때 하고 일이 없을 때는 노는 직업이다. 일이 있으면 주말이고 휴일이고, 여름이고 겨울이고 일을 찾아다니셨다. 그러니 아버지는 본인에게 주어진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몸이 성치 않았지만 오히려 벌리는 일당에 흡족해하셨다.


하지만 타일은 기술뿐 아니라, 힘과 체력이 요구되는 육체적으로 무척 고된 일이었다. 일이 고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버지는 매일 술을 달고 사셨다. 여느 직장처럼 야근을 자주 한다거나 그러진 않았다. 대략 6~7시쯤 되면, 일을 마무리하시고 집에 오셨다. 타일의 특성상 일하는 중에 먼지가 잔뜩 묻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집에 오시면 목욕이나 세안을 하셨다. 그러시고는 곧장 동네 근처 시장에 있는 술집으로 가서 동네 친구들과 소주나, 막걸리 등을 기울이셨다. 주로 시장 초입에 있는 'H홍어집'이 아버지와 친구분들의 아지트였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홍어를 좋아하지 않아서 홍어집에 가셨다가 오시는 날에는 그 냄새가 더 적응이 되지 않았다. 취함의 농도 차이가 있을 뿐 일반적으로 저녁 9시쯤 되면 귀가를 하셔서, 어머니가 차려드리는 저녁을 또 드셨다. 곡기를 꼭 챙겨 드셔야 한다나 뭐라나. 때때로 만취하여 집에 들어오시는 날에도 그 패턴은 항상 일관되었다. 그래도 다음날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셔서 전날의 혈중 알코올 농도를 유지하신 채 또 타일을 붙이러 가셨다.


그런 아버지를 사랑하신 어머니. 1954년 음력 2월생. 2021년 6월 기준 한국 통용 나이 예순여덟, 생일이 지나 법적 나이 예순일곱. 155cm, 50kg가량.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땅딸막한 아줌마.


제주도에서 태어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실제로는 어머니도 제주도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서울에서 평생을 사셨으니, 그냥 서울 사람이라 보면 된다. 어머니의 가정사는 조금 복잡한데, 굳이 지면을 빌어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어머니도 아버지와 같이 배움이 길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나와 주변 사람들에게는 항상 '그레이스' 하시고, '고져스' 하셨다. 한국말로는 교양과 기품이 있으셨고, 담대하셨다. 남들과 다르게 큰 그릇을 가지셨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는 '포용력'이 있으셨다.


어머니의 직업전선은 아버지에 비해 단순했다.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미싱'을 익히신 분이셨다. 적어도 10대 후반부터는 미싱을 하셨을 테니, 못 잡아도 50년은 미싱을 하신 그 바닥의 프로셨다. 1970년대에 평화시장 인근에서 근무하시면서, 당시 벌어진 '전태일 열사'의 분신 흔적을 목도하셨다고 하니, 대략 어머니가 활동하신 시대가 짐작된다.


어머니는 미싱을 하시면서, 섬유업체에서 일하시는 아버지를 처음 만나셨다고 하셨다. 두 분이 어떻게 눈이 맞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데이트가 거듭되면서 짠돌이셨던 아버지가 프러포즈 같지 않은 프러포즈를 하셨다고 들었다.  


"이렇게 만나서 커피값 쓰는 것도 아까운데 그냥 결혼합시다."


가히 아버지 다운 사랑 고백이다. 이 역사적인 멘트를 통해 최초의 우리 가족이 만들어졌다. 이후 1979년 7월에 내가 태어났고, 6년 뒤인 1985년 3월에 내 여동생이 태어났다. 이로 인해 명실상부 4인의 그럴듯한 '완성형 가족'이 만들어졌다.


어머니는 결혼 이후에도 미싱을 계속 돌리셨다. 처음에는 집안에서 미싱을 하시다가 내가 국민학교를 입학한 뒤에는 집에서 미싱을 치우고 밖으로 출근을 하셨었다. 그러나 이런 출근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 우리 가족이 살던 반지하 집이 누수로 인해 불이 났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출근을 하셨었고, 나는 학교에, 내 동생은 유치원에 있어서 다행히도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대신 그 '섬유 전봇대'는 다 타 없어졌다. 그 이후에 어머니는 집에 혼자 있을 아이들이 불안하셨는지 새로 이사한 방 세 칸짜리 집 한 칸에 미싱을 채워 넣고 집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셨다. 덕분에 집안에는 항상 실밥과 먼지로 가득했지만, 그래도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할 수 있는 어머니가 계셔서 행복했었다.


그 이후 이사 가는 집마다, 방 한켠에는 미싱이 자리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뒤에는 방 세가 있는 반지하 집에 살았는데, 그때 내 방은 가장 넓은 방이었지만 미싱과 동거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내가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을 복학한 2002년까지도 미싱과의 동거를 계속하다가, 2003년이 되면서 지금의 3층짜리 다가구 주택을 경매로 마련하시고 그곳을 우리의 삶터로 정하셨다.


이렇게 삶과 끊임없이 투쟁하신 아버지, 어머니는 나와 내 동생에게 항상 '근면'과 '성실'을 항상 강조하셨다.


우리 집 아들인 나. 이런 부모님 밑에서 나는 어릴 적부터, '나름' 착실히 살았다. 공부도 적당히 했고, 학교생활도 부모님 속을 썩일정도로 하진 않았던 거 같다. 98년 IMF의 동란에서도 서울의 저렴(?)하고, 괜찮은 대학교를 '특차'로 입학했고 무탈하게 졸업했다. 졸업 전에는 이미 그 힘들다는 취업난을 뚫고 1군 H건설회사에 입사를 확정하여 출근을 시작하였다. 내가 처음 건설회사에 취직하여 출근할 때는 무조건 열심히 하라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공돈 받을 생각하지 말고, 방울에서 딸랑 소리가 나도록 뛰어다녀!"


처음 입사했던 건설회사에서는 쉬운 말로 '개발사업'이라는 걸 했었다. 그때만 해도 사회에 굵은 울림이 주는 패기 있는 청년이 되고 싶었던 것 같은데, 당시에 내게 주어진 역할이 그렇게 크게 가슴에 와닿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설회사에서 매달 입금되는 월급과 격월로 입금되는 보너스의 유혹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았다.


입사 후 1년쯤이 되어 며칠간의 고민 끝에 공부를 조금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을 사는데 나만의 철학이 필요했달까? 여기까지 6개월이 더 걸렸다. 부모님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지만, 입사 1년 6개월 만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직서'를 쓰게 되었다. 물론 사직서를 쓰기 전에 국내 몇몇 일류대학의 대학원 진학을 위해 응시하였다. 뒷배도 두지 않고 회사를 관둘 만큼의 '깡'이 있다거나 아무런 대책이 없이 후일을 도모하는 '무모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대학원 합격통지서를 받고 나서, 회사의 퇴사를 마무리하였다.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시작하면서, 부모님과의 '조그마한' 갈등도 시작되었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어렵게 사신 분들이라, 학문이라는 거창한 무언가를 위해 매달 꼬박꼬박 통장에 들어오는 월급을 마다하는 아들의 행위를 전적으로 이해하시긴 어려웠던 것 같다. 특히 이러한 생각은 어머니가 더 심했다. 부모님 두 분 다 어릴 때부터 워낙 어렵게 사신 분들이라 배움이 길지 않으셨지만, 아들의 가방끈이 더 길어지는 것에 조금의 가중치를 더 두신 아버지와 다르게, 어머니는 실물경제에서 누락된 아들이 자칫 경제적 도태자가 될까 봐 내심 초초하신 듯했다.


대학원에 입학한 뒤 5년의 시간이 지난 2011년, 우여곡절 끝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학위수여식이 되어서야 처음 아들이 다녔던 학교에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과 이모가 함께 자리했다. 나는 박사 가운을 입고 사진을 한컷 박고 나서, 부모님께 박사 가운을 입혀드리고 싶었다. 어머니는 한사코 아들의 박사 가운을 마다하셨지만, 아버지는 한번 찍어보자며 아들이 입혀드리는 박사 가운을 흡족하게 걸치셨다. 양쪽 팔에 세줄이 박힌 묵직한 박사 가운이 충분한 보상이 되긴 어렵겠지만, 힘들게 사셨던 아버지의 지난날에 대한 조금의 보상이 되었으면 했다.  


나와는 사뭇 다른 여동생. 나보다 6년 늦게 태어난 여동생도 근면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155cm에 40kg 후반대의 체구를 가진 자그마한 이 친구는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통에 내가 국민학교를 다닐 때, 유치원생이었고,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초등학교를 다녔다. 이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동생이 내가 군대를 다녀와 복학하고, 세월이 지나 대학 4학년이었던 2004년에 이르러 비로소 대학생이 되었다. 같은 대학생 신분이 되어 동네 어귀의 포장마차에서 같이 소주를 한잔했는데, 이때 세상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동생이 더 이상 '그 어렸던 아이'로 생각되지 않았다.


내가 순발력을 바탕으로 일을 처리하던 것과 달리, 내 동생은 느긋함을 무기로 묵직하게 일을 처리하는 성향이다 보니, 나와는 결이 많이 달랐다. 우리 가족은 동생을 '나무늘보'라 칭했는데, 작고 조그마한 외모에 느릿느릿한 성격까지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동생은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갔고, 조금씩 나보다 더 단단한 성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범대를 졸업한 동생은 몇몇 길을 돌아와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근무 중이다. 나에겐 한없이 어려 보이는 동생이 누군가에게 '선생님'으로 불리고 있는 것을 보면, 인격적으로는 나 보다 나은 이로 성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칠순 즈음이 되시면서, 슬슬 우리 가족은 부모님의 은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실은 은퇴를 하셨어도 진즉 은퇴를 하셨어야 했다. 어머니는 노안이 심하게 오셔서 가까운 것을 자세히 볼 수 없으셨기 때문에, 조만간 그 바닥을 정리하려고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 미싱의 그 조그마한 바늘에 실을 기가 막히게 꿰시는 것을 보고, '눈 나쁜 거 맞냐'라고 여쭤보면, 평생 해온 감으로 끼는 거라 하셨다. 아버지는 물리적인 힘을 써야 하는 직업 특성상 칠순이 되어가면서 슬슬 체력적 한계가 오는 듯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타일 기공의 일당에 취해 그 일거리를 놓지 못하셨다.


부모님의 은퇴를 생각하면서, 나는 종종 현실적인 은퇴자금에 대해 여쭤보았다. 우리 가족은 가족의 경제적 문제에 대해 나름 거리낌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다시금 본인이 그간 타일을 통해 저축해 놓은 자금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야! 우린 걱정하지 마, 늙어서 쓰려고 그렇게 열심히 벌은 거니까. 너네만 잘 살면 돼."
"그래도 혹시 조금이라도 도움이 필요하다거나 하면 말씀하세요. 나도 알고 있어야 되니까."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는 도움을 드리겠다는 건지 아닌지, 아리송하게 끝맺음을 하곤 했다.




잠시 부모님의 벌이에 대한 집착 같은 책임의 근원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 이유를 찾으려고 할 때마다 아버지, 어머니뿐 아니라, 나와 내 동생의 모습이 함께 떠올랐다. 따듯한 말을 건네는 여타의 가족들과는 달랐지만, 우리는 누구보다도 서로를 치열하게 응원하는 가족이었다. 아버지 어머니의 헌신에 가까운 희생 덕분에 내가 있고, 내 동생이 있었다. 아버지의 타일과 어머니의 미싱으로 나의 '박사학위'와 내 동생의 '교원자격증'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어머니의 태연하게 '일을 가셨다'는 말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세종에 번듯하게 마련된  개인 사무실에서 창밖으로 잔잔하게 비단처럼 흐르는 '금강'을 바라보며 어머니께 전화를 하는 중이었다. 내 동생은 학교 선생님이라는 특성상 쉬이 '휴가'를 쓸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했다. 나도 내 동생도 '출근'했다. 애꿎은 어머니에게만 성질을 부렸다. 부모님이 편찮으셔도 우리는 당장 출근을 했다. 또 다른 집착 같은 책임감인지, 방관인지 모를 이 비린내 나는 현실 앞에 내 기분이 조금씩 어둡고 무거워졌다.  


갑자기 '나무 심기'의 달인인 스피노자가 떠올랐다. 스피노자가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한 것은 미래의 희망에 기대를 걸었던 것일까? 아니면 미래를 포기한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던 것일까?


다음날인 15일이 되어서야 아버지는 PCR음성 확인 문자를 들고, 어머니와 함께 다시 B대학병원을 찾으셨다. 여느 드라마에서 보던 것과 같이 의사는 아버지의 늦은 방문을 질책하셨다고 했다. 곧바로 입원절차가 진행되었고, 배에 찬 복수를 제거하기 위해 배에 관을 박는 시술이 진행되었다.  


아버지의 입원과 함께 멈추지 않았던 타일 작업이 멈췄다. 어머니는 근 50년간 돌렸던 미싱을 멈추셨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가 입원을 하셨다고 하니 무언가 일이 반쯤은 해결된 것 같았다.


...


다음날인 16일 아버지는 '담도암'을 판정받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2년이 흐른 뒤에, 지금에서야 이 글을 엮어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드립니다. 

https://bookk.co.kr/bookStore/66332918fc0d5301c78a2ed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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