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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ke Nov 05. 2019

[Prologue] 서른살 직장인, 대학원을 결심하다

생존형 인간을 위한 지침서를 시작하다

매너리즘을 느끼는 직장인, 치열한 현실을 살아내는 사회 초년생, 취업 준비생들을 위해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을 작성하였습니다.


1. 열정이 넘치던 내겐 없을 것 같았던 신입 2년 차의 장벽

2016년, 간절하게 바라던 증권사에 입사했다. 흙수저에 지방 거점대학 출신인 내게 취업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누구나 그렇듯, 1년간의 취업 준비와 면접 과정에서 점차 꿈보다는 "입사(入社)"라는 타이틀 자체를 갈망하게 된다. 그 시기 다른 목표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오로지 "입사" 그뿐이었다. 비슷한 처지의 모두가 그랬다. 증권사에 입사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입사한 증권사의 운용 포지션, 기쁨도 잠시였다. 누구나 그렇듯 신입사원 시절에는 모든 것이 조심할 것 투성이 어려운 것 투성이었고, 그 터널을 지나기란 쉽지 않았다.

첫 출근길에 보았던 여의도역 4번 출구, 아침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도 무섭게 북적대는 출근길. 첫 출근의 벅참과 긴장감이 생생하다. 물론 3년 뒤에 그 출근길을 더 이상 걷지 못할 줄은 그땐 몰랐다.

1년 차를 통과하고 2년 차에 접어들 때쯤, 업무적으로는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나가고 있었다. 사내와 사외에 지인들이 생겨 재미를 붙일 즈음 누구나 한 번쯤 온다는 퇴사의 유혹과 직장생활의 '회의감'이 나를 찾아왔다. 내게는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슬럼프라는 그것이 조직 내 상하관계로 인해서 슬금슬금 다가온 것이다.


그 기간동안 꽤 힘들었다. 스트레스 때문에 편두통이 생기고 몸이 망가져갔다. 그렇지만 뒤로 물러설 곳이 없었기에 버티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면서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해가고 있었다. "책임"이라는 놈을 어깨에 짊어지고 반복되는 일상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어른이 되고 있었다.

            

2. 서른, 선택의 기로에 대학원을 선택하다

그런 삶이 나쁘진 않았다.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독립, 느린 속도이지만 차곡차곡 채워져 가는 통장잔고가 위안을 주었다. 또한 2년 차가 막 지나던 그 시기에 2년 치 학자금 대출을 모두 상환할 수 있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딱 그 시기쯤 나는 서른을 맞았다.

나이 서른, 젊다면 젊지만 기로에 선 나이 때. 나는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인턴부터 증권사까지 대략 3년 반 정도의 사회생활 동안 내가 배운 것은 무엇인가?
의식의 흐름 속에 정답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어느 날 5호선 출근 길에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뒤적이다 우연히 어떤 글을 읽었다.

「죽음의 순간이 왔을 때...
인생의 후회로 남을 것들은 어떤 것들일까?
죽음의 순간이 왔을 때
'내가 그걸 안 해본건 후회가 되는구나...'
하는 것은 무엇일까? 」

누군가의 블로그였다.
나는 그 블로거의 질문에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무엇을 후회할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때 가장 강렬한 것을 잡은 게 바로 대학원(大學院)이었다.

고민에 끈을 쫓아가던 차에 알게 된 야간 대학원이라는 것. 일반 대학원도 아니고, 전일제 전문 대학원도 아닌 야간 대학원(夜間大學院).

그렇게 나는 후기 대학원 전형에 지원했다. 팀원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지원했다.

내게 MBA가 더욱 적합하다고 생각했지만 어림없었다. 그래서 그보다 더 싼 경제 대학원에 지원했다. MBA 과정의 비용 수준까지 억지를 부릴 용기는 없었다. 경제대학원 수준도 감지덕지라 여겼다.

경제 대학원을 다니시는 지인 분들에게 서류 전형이나 면접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학업계획서를 형식적으로 준비하면 되고, 지원 동기만 확실하면 별로 준비할 것이 없다고 했다.




3. 나는 야간 대학원에 다닌다

주변의 만류와 권유, 양자가 팽팽했다. 처음에는 모두들 긍정적이다.

하지만 등록금 액수를 듣고 난 뒤에는 나의 계획을 만류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나는 회사에 지원을 받을 수도, 그렇다고 갈 수 있는 재정상태도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그들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번 돈을 그대로 대학원에 쏟아붓든, 아니면 다시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걱정이 되었다. 하나 같이 다 걱정이었다. 내가 일과 학교를 병행할 수 있을까? 신입 주제에... 특히 서류 준비하고 면접 볼 때는 정보가 부족해서 애를 먹었다. 사에 알리지 않고, 나는 두 군데 모두 지원했고 두 군데 모두 합격증을 받았다.

직장인 대상 코스는 Y대와 S대 두 대학이 운영 중이다. S대가 더 저렴했다.

코스의 여건도 S대가 좋았다. 휴학도 더 많이, 학비도 더 저렴했다. 심지어 다니돈 회사와도 훨씬 더 가까웠다. 하지만 나는 지인 분들이 먼저 다니고 있는 Y대를 선택했다. 야간대학원의 수준이란 직장인 재교육에 불과하다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사실 두 대학원 간의 차이는 무의미해 보였다.

8월 중순에 입학식과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2018년 9월 1일에 개강을 맞이했다.

올해로 나는 야간대학원에 3학기째이다.



4. 기자와 작가를 꿈꾸던 비상경계 학부생에서 Finance Guy가 된 Jake의 커리어 이야기

나의 시작은 진짜 문과생이었다. 경영, 경제가 아닌 사회학부 출신의 문과생. 기자와 작가를 지망했던 고3의 꿈을 대학에서 이루겠다고 지방에서 상경한 흔하디 흔한 신입생이었다. 하지만 경영학 전공으로 졸업하게 되었다. 전공을 바꾼 것이다.

그런 내가 증권사 홍보대사를, 회계법인에서 인턴을, 증권사 본사에서 운용역을, 이제는 평가사에서 연구원으로 일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나누어보고 싶다.

여의도에서도 둘러보면 나 같은 놈들은 많았다. 편안함을 버리고 살길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다.

전공을 바꾸고, 편입하고, 자격증을 따고, 관련 분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친구들이다. 광화문, 여의도, 역삼동에 가면 부지런한 친구들이 널려있다. 나도 조금만 더 빨리 알았다면 좀 더 나은 조건에서 경쟁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안고 있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조금 더 열악한 환경에서 커리어를 시작했고, 그 환경에서는 이런 길을 말해주는 선배도 없었고, 먼저 이 업계 경력을 시작한 친구들도 없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내 이야기를 통해서 나보다 살길을 궁리하는 나와 같은 처지의 젊은 친구들이 우연히 브런치에서 내 글을 발견하길 바란다, 그래서 그들이 더 좋은 커리어를 밟길 바라는 마음에서 브런치를 시작한다. 이 글을 대학교 2~3학년들이 읽는다면 가장 효용(效用)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처지에서 이직이나 커리어를 고민하는 직장인들의 초점도 맞추고 싶다.




- J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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