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크로아티아 시베니크
창문 틈 사이로 진한 가로등 불빛이 새어든다.
문득 이 집도 이젠 안녕이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크로아티아 시베니크에서 며칠 지내지 않은 집이지만 짐을 풀고, 밥을 해 먹고, 나른한 몸을 기대고, 눈을 붙이고 하는 사이에
몸도 맘도 이 곳에 익숙해졌나 보다.
하얀 시트와 깔끔한 침실이 놓인 호텔에서
하루, 이틀 짧은 시간동안 잠시 씻고 잠만 자고 나가는 정돈된 여행과는 사뭇 그 느낌이 다르다.
그 말은 곧 떠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밖에 있는 시간만큼이나 안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이고.
새삼 마지막 날 밤이 되면 그새 정든 곳을 떠난다는 아쉬움이 크게 몰려온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묵었던 집을 떠나는 일이 한두 번도 아니건만
매번 떠나기 전날 밤,
한껏 풀어놓은 살림살이들을 하나 둘 챙길 때면
괜스레 마음 한쪽이 무겁다.
내 것처럼 익숙했던 것들이 내 것이 아니었음을 다시금 느끼게 되어서 일까.
정든 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도,
또 새로운 낯선 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도,
아쉬움과 설렘, 그리고 약간의 긴장감이 동반된
익숙하지만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여행자의 일상인 듯하다.
나는 집이 좋았다.
매일같이 깔끔하게 치워져있는 호텔보다
쓰레기봉투를 사들고 들어와 분리수거를 하는 내 모습이 담긴 집이 좋았다.
다른사람의 손이 타지 않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이 공간이 내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는 묘한 설렘을 가져다주었다.
집이 사람에게 주는 에너지는 생각보다 클지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면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고, 하루 종일 돌아다닌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오면 편안한 소파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에는 가로등이 켜지는 창가를 바라보며 음악을 듣고,
밤이 찾아들면 포근한 침대에 누워 깊은 잠을 청한다.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
여행은 살아보면 절실히 느끼게 된다.
살아보면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무엇인지,
낯선 여행지에서 집이라는 익숙한 공간이 주는 묘한 안도감이 어떤 것인지 말이다.
여행지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관광지가 아닌
슈퍼마켓과 빵집을 찾아보고,
집에 도착하면 창문을 열고 밖을 보는 대신
세탁기를 먼저 찾는다.
그게 여행지를 일상처럼 살아가는 내 모습이다.
간혹, 이른 아침 씻지도 않은 채로
허름한 옷가지를 대충 걸치고 슬리퍼를 끌고 나와
갓 나온 빵과 우유를 사들고 들어가는 모습에
당황하는 사람들을 마주치곤 한다.
아마 그들 눈에는 이런 내 모습이 낯설으리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곳의 일상을 함께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루 이틀 지나다 보면
어느새 그들도 나도 그 모습에 익숙해져 간다.
그런 모습들이 하나 둘 쌓이다 보면
살아보는 여행에 대한 재미가 꽤나 쏠쏠해진다.
어디에 떨어져도 누구를 만나도
뚝딱뚝딱 내 자리 하나쯤은 만들어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작은 용기가 생겨난다.
짐을 챙기다 문득 열심히 한 끼, 두 끼 차려먹던 주방에 시선이 간다.
따뜻했던 집밥이 있었기에 이 곳에서의 여행도 든든히 해낸 것만 같은 기분이다.
내일은 또 새로운 집이 기다리겠지,
그리고 그곳은 또 익숙한 안도감을 가져다주겠지.
집을 떠나와 또 다른 집을 만나며
새로운 곳에서 익숙한 일상을 다시 그려낸다.
ⓒ 2016. bonita All Rights Reserved.
구독과 공유는 작가에게 희망입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