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nita Nov 19. 2016

지금까지 걸어온 그 시간을 위해

#58. 폴란드 브로츠와프

조명을 몇 개 껐다.

테이블 위에 작은 초를 하나 켰다.

그 뒤 스피커에선 나지막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오늘은 여기까지 잘 걸어와준 나에게

지금까지 잘 버텨와 준 나를 위해

조촐한 축하를 해주고 싶어 졌다.

그렇게 오늘은 조금 다독여주고 싶은 날이다.

집 앞 마트에 들러 간단히 과일 몇 가지와

치즈 두어 개를 사 온다.

마침 호스트가 선물로 주고 간 샴페인까지 시원하게 준비해 둔 참이었다.     


오늘따라 집 곳곳에 은은하게 켜진 백열등이

참 따뜻하고 좋다.

향긋한 백합 향이 베여있는 집에 들어올 때면

엄마라도 달려 나와 토닥여주는 것처럼

한없이 포근한 따스함이 베어 든다.     

처음 보는 낯선 집을 하나둘 내 이야기로 채워간다.

널찍한 식탁도, 기다란 창문도,

하나둘 걸린 액자들도.

하염없이 타고 있는 향긋한 캔들과

먹다 남은 과자들까지.


어색한 공간들 사이를

모두 익숙한 내 이야기로 덮어본다.

나의 온기가 묻어 있는 추억들로

곳곳이 채워지기 시작하면,

이곳은 그제야 진짜 내 집이 된다.     

이곳에서 내 생각을 적고, 내 감정을 그리고

하루를 채우며, 때때로 오늘처럼 열심히 걸어온 나를 위로하기도 한다.     


칠링이 잘 된 샴페인을 잔에 한가득 따른다.

뽀글뽀글 올라오는 기포를 따라

기분도 살며시 올라간다.

첫 잔은 걸음을 응원해주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건배다.     

달콤한 사과향이 기분 좋게 퍼진다.

아름다운 도시를 만나 그곳을 여행하고,

아늑한 집에 들어와 하루를 정리하고,

내 삶의 한 순간들을 따뜻한 이야기들로 채워 넣을 수 있는 오늘 하루가 있어 참 고맙다.    

 

어느덧 여행도 꽤나 적응이 된 듯하다.

배낭을 메고 곳곳을 걸어 다닌 지 3개월 정도가 되니 이제야 몸도 마음도 제대로 가눌 수 있어진 듯싶다.     

새벽마다 일어나는 날도,

조그만 버스에 앉아 7시간이고 달리는 날도.

다음 여행지는 어떻게 가야 할지,

이곳에선 무얼 하며 다녀야 할지,

그렇게 고민하는 나날들도 조금씩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여행이 단순히 놀고먹는 것에서 끝나면 좋으련만.

잠시 들렀다 돌아가는 여행이 아니고선

걱정 없는 여행이란 쉽게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다음 여행지에 발을 디디기 위해선 생각보다 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그곳으로 가기까지,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

그리고 또 다른 곳으로 떠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달려야 하니 말이다.     

어쩌면 지금에서야 여행의 이면까지도 사랑할 줄 아는, 그 모습마저 담담히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여행자가 되어가는지도 모르겠다.

  

자연스레 도착한 곳에서

다음 여행지로 떠나는 버스를 알아보고

이동하는 날이 되면 널브러진 짐을 꾸려

다시금 버스에 오르고

그렇게 열었다 닫았다 걸었다 멈췄다 하는 하루를 조금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막연히 긴장만 가득했던 첫 여행.

그렇게 맘 놓고 편히 쉬지만은 못 했던 날들 덕분에

이제는 여행자로 살고 있는 하루 속에서

여유를 찾아볼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시간 속에서도

문득 멈춰 서선 나에게 귀를 기울이고,

손 하나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 무거운 날엔

내 마음의 무게를 먼저 덜어내고

어떤 순간에서도 나라는 존재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생각만큼 온전히 내 자신을 꺼내놓는 시간이

가볍지도 쉽지도 간단하지만도 않다.

그럼에도 복잡하고 어렵고 무거운 시간들이 있기에 나는 계속해서 여행을 꿈꾼다.

여행이 아니라면 마주칠 수 없는 순간들이므로.

샴페인을 한잔 더 채운다.

시원하게 넘어가는 샴페인을 따라

지금까지 걸어온 내 발걸음도 소리 없이 지나간다.   

  

때론 걸어도 괜찮다.

무디게 걸어온 그 길이

한없이 길어진 끝을 보고 있노라면

반드시 그 발걸음에 어떤 목적을 싣고 있지 않더라도 지금까지 묵묵히 찍어낸 발자국만으로도

꽤나 괜찮은 뿌듯함을 남겨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오늘도 여행이 괜찮다.     

잔을 기울인다.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그리고 남은 여행을 위해

한번 더, Cheers!


       ⓒ 2016. bonita All Rights Reserved.

 

        구독과 공유는 작가에게 희망입니다 :D

매거진의 이전글 난쟁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실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