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nita Dec 11. 2016

여행을 떠나 다시 일상에 도착하다

#이 순간에도 여행을, 일상을, 그곳을 꿈꾸고 있는 날

발코니로 걸음을 옮겼다.

창문을 열었고, 하얀 창틀 사이로 따스한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창가에 턱을 괴고 가만히 거리를 바라본다.

쨍하게 빛나는 말라가의 아침.

슬며시 바람이 분다.

반짝이는 햇살을 머리 위에 두고 맞는 가을바람은

내 마음까지 일렁이게 만들고 있었다.     



여행을 떠나왔다.

여행을 떠나, 다시 일상에 도착했다.     

평범한 아침 햇살에도

괜스레 마음이 움직이는 걸 보면

아무래도 오늘은 좋은 일이 생기려나보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걸어 다니는 사람들 틈 사이로 낯선 스페인어가 곳곳에서 피어오른다.

낯설고 어색한 언어가 창문을 타고 들어와 집안을 가득 채울 때면 

나는 또다시 나갈 준비를 한다.     



이 거리와, 이 사람들과, 이 바람과, 이 햇살을 느끼기 위해.

그들과 오늘이란 하루를 함께 걸어가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선다.    

 

이른 아침부터 활기찬 거리는 자유롭고 여유로운 분위기로 말라가의 아침을 한층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

오늘따라 스페인에 와있다는 사실이 유독 깊이 실감이 난다.     



집 바로 앞에 있는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작고 아담한 규모이지만 필요한 모든 것들이 채워져 있는 알찬 시장이다.     


아침부터 시장 앞 작은 테이블 하나를 잡고 앉아

막 구워낸 해산물 한 접시에 낮술을 들이켜는 사람들.


여행에선 언제고 즐길 수 있는

낮술이 있어 참 좋다. 

어쩌면 그 낮술이란 소소한 낭만이라 불리는 이름의 또다른 모습이 아닐까.

이곳에서만큼은 낮부터 기분좋은 낭만 한 잔을 걸치고 거리를 걸어도 누구 하나 막는 사람이 없다.     

이 자유로운 스페인에서 누가 우릴 막는단 말인가.


우린 지금 스페인이고,

작지만 아름다운 말라가에 있는데 말이다.     



시장 안으로 들어서자 알록달록한 과일가게가 빼곡히 자리를 잡고 있다.

그 뒤로 다양한 식재료를 팔고 있는 가게들까지 더해지면 왁자지껄한 시장의 냄새가 기분 좋게 코끝을 찌른다.  

   

빨갛고 노랗고 푸른 빛깔로 가득 채워진 과일가게를 지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어느새 망고 하나를 손에 쥐고 있다.

탐스럽게 익은 말랑말랑한 애플망고는

먹지 않아도 단내가 폴폴 풍기는 것만 같았다.     



결국 달콤함에 못이겨 애플망고 2개와 치리모야  2개를 고른다.

오늘 바로 먹을 건지 물어보는 아저씨는

애플망고와 치리모야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정성스레 잘 익은 과일을 골라주신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는 달콤한 과일을 가방에 한가득 담아놓고는 다시 시장을 나왔다.     



10월의 끝자락에서도 말라가의 햇살은 여전히 뜨겁다.

지난주에 몇 차례 퍼붓던 비 때문일까.

약간의 습함이 뜨거운 공기 속에서 살며시 고개를 내민다.

   

더위를 가라앉힐 겸 근처 카페로 들어섰다.

꾸덕꾸덕한 브라우니 하나와 아메리카노를 시켜두고 거리를 바라본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한낮의 말라가를 걷고 있다.          



그때, 연세가 지긋해 보이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카페 안으로 들어오셨다.

조그만 DSLR 카메라 하나를 목에 매신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스페인을 여행하시는 듯해 보였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자주 마주치는 광경이다.

젊은 사람들 못지않게 머리가 하얗게 새신 어르신들도

꽤나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메고 운동화 끈을 질끈 묶은 채,

낯선 곳의 지하철을 타며 여행을 하시곤 한다.     



그럴 때면 잠시나마 힘들다고 투정 부렸던 순간들이 부끄러워 겸손해질 뿐이다.

여행에서 나이가 무엇이 중요하겠냐마는,

배낭을 메고 떠나는 여행이

생각보다 편안하고 쉬운 길만 걸을 수 없단 걸 알기에 그 연세에도 낯선 곳을 찾아 떠나시는 열정에 존경스러움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두 손을 꼭 맞잡한발 두발 함께 낯선 여행지를 걸어가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뵐 때면,

나도 꼭 그분들처럼 나이가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어도,

머리가 새어도,

얼굴에 주름이 조금 더 생겨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낯선 곳으로 비행기를 타고,

처음보는 지하철역에 내려 지도를 찾아보고,

꽉 찬 배낭을 둘러메고 신호등을 기다

그런 열정이 남아있는 사람으로 말이다.

    

나이가 들더라도 꼭 하나 잃어버리지 않길 바라는 게 있다면,

그건 아마도 새로운 세상과 마주하는 것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과 사랑이리라.


익숙함을 떠나 낯선 것들을 찾아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가슴이 뜨거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리라.



그런 생각에 잠겨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때,

먼저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께서 말을 걸어오신다.

"혹시 와이파이 비밀번호 알고 있나요?"     


카페에 들어오자마자 미리 와이파이를 연결해두었던 참이었다.

비밀번호가 꽤 길었지만 간단한 스페인어 덕분에 쉽게 머릿속에 남아 있다.     



흔쾌히 비밀번호를 눌러 연결을 해드렸다.

꽤나 긴 비밀번호를 지체 없이 누르자

할아버지께선 놀란 표정을 지으시며 이 비밀번호를 전부 기억하냐며 웃어 보이신다.


고맙다는 인사를 해주시는 할아버지께

나도 밝게 웃어 보였다.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건만,

문득 머릿속에 잘 남아있던 비밀번호가 고마웠다.

작지만 사소한 호의를 베풀 수 있었으니 말이다.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오신 할머니께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저기 젊은 아가씨가 와이파이를 연결해주었네,

비밀번호가 꽤나 긴데도 척척 누르지 뭐야!"     


미소를 머금고 들으시던 할머니께서

본인에게도 비밀번호를 좀 알려줄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다.

어려울 일 하나 없었다.

다시 한번 비밀번호를 연결해드리자

그 기다란 비밀번호의 정체가 궁금하셨는지 

무슨 뜻이냐며 물어오신다.     



'항상'이라는 뜻의 스페인어인 siempre와

카페의 이름을 뒤에 붙인 비밀번호라설명해드리자 할머니께선 그제야 알았다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셨다.


러고는 다시 나에게 물으셨다.

"혹시 여기에 살고 있나요?"     

나는 꽤나 당황스러웠다.

여행을 떠나온 나에게 이곳에 살고 있느냐는 질문은 당황스럽지만 기분 좋은 떨림을 가져다주었다.

     

"아뇨, 저도 스페인을 여행하고 있는걸요."

여행을 한다는 말에 얼마나 여행을 하냐고 물으셨고, 나는 세계여행을 떠나와

한 달간 스페인에서 머물게 되었다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꽤나 긴 시간동안 세계를 여행하는 중이라는 걸 아시자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선 든든한 응원의 말씀을 아끼지 않으셨다.

"오, 세상에. 너무 멋진걸요! 응원할게요!

당신의 여행도, 그리고 당신의 인생도 말이에요."     


진심이 담긴 따뜻한 응감사의 마음을 표하며,

두 분의 여행도 항상 즐움이 가득하시길 바란다는 훈훈한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는

먼저 카페를 나왔다.     



거리를 걸어가는 내내 그 여운이 가시질 않았다.

여행을 떠나 낯선 곳에 도착해

그곳에서의 익숙한 일상을 꿈꾸던 나에게


이곳에 살고 있느냐는 질문은

내 여행이 잘 흘러가고 있다는

반증 같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 순간, 이곳에 정말 살고 싶어 졌다.

연한 에스프레소를 잘 내리는 단골 카페가 생기고,

저렴하고 맛있는 피자를 양껏 담아주는 가게를 게되고,

한낮의 시에스타가 다가오면

집으로 들어가 달콤한 낮잠에 빠지는 그런 하루를.

내가 살아가는 곳이라 말하고 싶어 졌다.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내 모습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쩌면 그 바람이 영영 허상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안도감을 남겨주었다.

     

일상을 살아가는 하루.

내가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아닌 곳에서

나는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여행을 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매일 설렐 수는 없지만,

가끔은 가슴이 터질 듯한 설렘으로 채워지기도 하고,


눈물이 날만큼 힘든 날도 있지만,

때론 행복해서 눈물이 날 만큼 가슴벅찬 날도 있는 것처럼.

어쩜 여행과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는 이토록 닮아있다.   

  


일상을 살고 있는 그곳의 하루가 여행이라면 어떨까.

그렇다면 우리의 하루를 조금 달라질 수 있을까.

여행지에서 느끼는 행복도, 설렘도, 떨림도, 긴장도

어쩌면 우리에겐 이토록 가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그 일상에서 말이다.   

  

나는 그곳에서도 여행이었고,

지금도 여행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일상이었고,

지금도 일상을 살고 있다.



말라가의 빛나는 햇살이 나를 비춘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를 비춘다.

일상과 여행 그 사이를 거닐고 있다.


떠나온 낯선 곳에서 달콤한 일상이라는 시간이 살며시 스며들고 있었다.



        ⓒ 2016. bonita All Rights Reserved. 


         구독과 공유는 작가에게 희망입니다 :D

매거진의 이전글 작은 카페에 앉아 크루아상 하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