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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ita Dec 18. 2016

차가운 바람에 꺼내보는 작은 용기

#68. 스페인 네르하

아무래도 오늘 저녁은 외식을 해야겠다.

친절한 호스트 덕에 네르하 지도 곳곳에 표시된 곳들을 전부 가려면

이곳에 머무는 3일간의 시간으로는 없이 부족한 터였다.    

 

이것저것 이곳에서 할 만한 것들을 몇 가지로 추려놓고는 오늘 저녁은 선셋을 보기위해 근처 해변으로 나선다.     

네르하의 저녁이 드리워지는 해변을 걷는다.

모래사장과 그 위로 부서지는 새하얀 파도가

네르하에 도착했음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어느덧 해변에서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던 사람들도

하나둘 자리를 접고 돌아가는 시간이다.

서둘러 호스트가 추천해 준 선셋 포인트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조금 더 지체하다간 붉게 물드는 석양을 놓칠지도 모르니 말이다.  

   

조그만 언덕을 하나 넘자 탁 트인 바다와

그 위로 덩그러니 떠있는 붉은 해가 나를 맞는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저녁이지만

붉은 해를 보고 있으니 마치 뜨거운 태양의 열기가

내 앞까지 밀려오는 것만 같다.   

  

바다 위에서 천천히 저무는 해를 보는 순간은

언젠가 되었건 지금 이 순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낭만적인 순간이다.     

해가 지고 뜨는 지극히 평범하고 익숙한 모습들이지만

우리의 하루에는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면

당연하지 않은 순간들이 참 많다.     

아름답게 보자면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그렇기에 고개를 돌리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들도 너무나 많다.   

가끔은 나에게 주어진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에

새로운 시선을 보내보는 건 어떨까.

어쩌면 똑같았던 하루가

조금은 낯설고 설레는 순간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해가 지고 또다시 해가 뜨는 것처럼

일어나서 잠이 드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만은 않은

소중한 시간 속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해가 바다 밑으로 숨자 슬슬 허기가 몰려온다.

도저히 집까지 걸어가 요리 해 먹을 만한 체력이 남아 있질 않다.

선셋을 보겠다고 네르하에 도착과 동시에

쉬지않고 열심히 걸은 탓이겠다.

    

해변에서 조금 걸어 나와

근처에 있는 가게를 둘러보다 마음에 드는 식당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마침 '마리아 보니따'라는 가게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저녁,

따스한 불빛이 반짝이는 가게와

향긋한 바다의 재료를 듬뿍 담은 요리들을 보고 있으니

이내 멈춰선 발걸음 앞에서 넋놓고 군침만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지체 없이 식당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시원한 샹그리아를 한 통으로 시키고

문 앞에서 봤던 메뉴를 줄줄 읊는다.    

 

오늘은 조금 과식을 해야겠다.

과카몰레가 얹어진 아보카도와 감바스가 조화를 이루는 에피타이저를 하나 시켜두고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까지 통째로 꼬치에 구워져 나오는 메인 요리 하나와

크림소스로 버무려진 연어 스테이크까지 넉넉히 시켜둔다.     

주문을 마치고 시원한 샹그리아 한 잔을 따른다.

즉석에서 바로 썰어낸 과일들 위로

붉은 레인와인을 콸콸 붓고 얼음을 몇 개 띄워 낸 무심한 샹그리아는

시원하고 새콤달콤한 맛과 함께 피곤했던 몸을 나른하게 풀어놓아 주었다.     


샹그리아 한 잔과 달콤한 네르하의 저녁이 겹쳐지고 있다.

문득 밖에서 소나기가 내린다.

조금 늦었더라면 흠뻑 젖었을지도 모르겠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를 감상해본다.

가만히 듣다 차가운 샹그리아를 다시금 홀짝 거린다.


그 사이 저녁시간이 되었는지 양옆 테이블엔 사람들로 가득 찼다.


한쪽에는 대가족으로 보이는 6명의 가족이 한 테이블을 잡았고,

또 한쪽에는 할머니 세 분과 할아버지 한 분께서 여행을 오신 듯해 보였다.     

모두가 자리를 잡고 앉자

드디어 마지막 메인 요리가 테이블 위로 나왔다.

누가 봐도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마침 한참 동안 메뉴판을 보시며

무엇을 시켜야 할지 고민을 하시던 옆 테이블의 할머니께서 나에게 슬쩍 무엇을 시킨 거냐며 물어보신다.     


고개를 들자 테이블에 앉아계시던 모든 어르신들이

일제히 나와 내 음식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계셨다.

무척이나 이 음식이 마음에 드신 모양이다.     

꼼꼼히 손으로 집어가며 주문한 음식을 알려드리자 고맙다며 눈짓을 보내신다.

맛있는 음식과 활기찬 식당 안의 분위기,

그리고 즐거운 사람들과 함께하는 저녁식사는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달콤한 순간 이리라.     


결국 내 옆 테이블은 온통 내가 주문한 음식들로 도배가 되었고,

맛있게 드시며 행복한 눈짓이 오가는 동안

왠지 모르게 뿌듯한 마음이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대가족으로 뭉친 또 다른 테이블은

화기애애하고 왁자지껄한 가족의 모습이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즐겁게 만들고 있었다.     


카메라를 꺼내 음식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던 탓이었을까.

사진이 필요하면 직접 사진을 찍어주시겠다며

옆에 앉아계시던 아저씨가 말을 건네 오신다.     


그렇게 우린 전혀 모르던 남에서

호의를 건네고,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다.


마치 처음부터 함께 식사를 하러 온 일행인 것처럼

우리는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웃음을 나누었고,

네르하의 밤을 나누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많은 순간들과 마주친다.

그중에서도 나는 참 많은 도움을

그다지 힘든 노력을 들이지 않고

너무 쉽게도 받으며 걸어왔구나라는 부끄러운 생각이 살며시 고개를 내민다.

     

언제나 선뜻 부탁도 하기 전에 먼저 다가와 주는 사람들을 보며

왜 나는 받기 전까지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지

굳게 다물고 있던 내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남에게

심지어 생김새도 언어도 다른 누군가에게

그들은 언제나 먼저 다가와 주고 있었다.     


항상 받기만 했던,

받고서는 먼저 다가갈 줄 몰랐던,

이기적인 나의 모습에 고개를 떨군다.

먼저 다가갈 수 있는 용기를

왜 나는 내지 못하고 있던 걸까.

우린 뭐가 그렇게 무서웠던 걸까.     

매몰찬 거절이 무서웠던 걸까.

낯선 누군가가 건네는 냉담한 표정이 무서웠던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와 상관없다는 이유만으로 먼저 다가갈 그 어떤 용기도 만들어내지 못했던 걸까.    

 

각자가 자신의 것만을 챙기며 살아가는 시대에서

우리는 쉽사리 받지도 건네지도 않는 모습에 익숙해졌는지 모르겠다.     


누구도 먼저 건네지 않으니,

아니면, 나조차도 먼저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생각조차 없으니

우린 서로에게 도움도 피해도 주지 않는

인정이 메마른 배려를 하고 있던 건 아닐까.    

아무래도 내일은,

아니, 이 저녁을 함께 보낸 지금부터는

누구에게든 먼저 다가가야겠다.     


어려울지도 모른다.

처음이라 어색할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주춤거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오늘을 떠올리면 조금은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이 세상엔 대가 없이 건넬만한 작은 호의들이 꽤나 많고, 차가운 거절보단 따뜻한 미소를 건네주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걸,

내가 건넨 소소한 호의보다 돌아오는 따뜻한 마음이 더 크다는 걸 알고 있으니 말이다.    

차갑게 스쳐 지나가는 매몰찬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나마 따뜻한 손길을 담아

이 길을 천천히 걸어보자.  

   

주지도 받지도 않는 딱딱한 마음이 아닌

받을 생각 없이 줄 수도 있는

넉넉한 마음을 꺼내보자.     


그게 어떤 변화를 가져오든 가져오지 않든

우리에게 중요한 건

내가 먼저 다가갈 수도 있다는 그 사하나만으로도 충분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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