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nita Feb 09. 2017

낡은 낭만을 타고 달려본 적 있나요?

#78. 포르투갈 포르투

포르투에 도착하자마자 커다란 배낭을 짊어 메고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간다.

생각보다 언덕진 곳이 많은 포르투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는 나에겐 생각보다 쉽지 않은 길들이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한발 한발 떼고 있던 그때,

문득 고개를 돌린 유리창 안에서

조그만 무언가가 지친 발걸음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그대로 멈춰 서서는

천천히 허리를 인 채 가까이 다가갔다.


다름아닌,

작고 앙증맞은 트램 모형이다.

 


익숙한 트램인 것 같으면서도

리스본에서 보았던 트램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낡은 철로 위를 달리며 끼익 거리는 짙은 소음을 내는 트램을 보고있노라면

아주 낯설고 이국적이면서도

마치 오랜시간 봐왔던 것만 같은 아이러니한 익숙함이 마음을 적신다.


아직까진 옛것이 그대로 남아도 괜찮다는,

그토록 끊임없이 빠르게 변해가는 세월 속에서도

너만큼은 변치않고 그 자리에 있어주었던 것 같은,

뭔지 모를 위안과 따스함이 묻어나오는 것만 같아

이토록 트램 앞에선 발걸음 하나도 멈추지 않을 수가 없나보다.


조금 더 낡고 빈티지한 색감이 매력적인 그 트램은

포르투라고 적혀있는 걸 보니 포르투 트램임이 분명했다.

포르투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트램이 있었다니!

리스본에서 느껴보지 못한 낭만적인 트램의 추억을

이곳에서라면 실현시킬 수 있을지도 모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설렘에 심장이 마구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애써 떨리는 마음을 누르며

집 앞 가까이 다다랐을 즈음,

한 번 더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눈앞에 마음을 뺏겼던 트램이 멈춰 서있었다.

사람을 태우고 있는 커다란 모습의 트램은

따뜻하고 은은한 색감의 나무

빛바랜 베이지 톤으로 채워져

포르투의 낭만을 한껏 부풀리고 있었다.     


그토록 염원하던 리스본의 28번 트램보다도 내 마음을 더욱 강하게 흔들었다.

포르투의 트램은 훨씬 더 매력적인 세월의 냄새가 여행자의 낭만을 가득 실어나르는 것만 같았다.


그 트램을 보는 순간, 모든 짐을 내려놓고

당장 철로 위로 달려가 싶을 뿐이었다.

반드시 하루 온종일 저 트램을 타고

포르투 곳곳을 누비며 잊지 못할 낭만을 되새기리라 다짐을 해본다.



하지만 생각보다 트램을 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는 트램은 많지 않은 데다

현지인들이 아닌 관광객들을 위한 자리로 채워진 탓에 강변을 따라 달리는 트램은 언제나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유롭고 한적한 트램 중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창문을 열고 조용하고 느긋하게 오로지 강가를 달리는 트램만이 내 모든 순간을 가져가길 바랬던 나로서는 토록 북적거리는 트램은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오늘쯤은 탈 수 있을까 하며 매일같이

집 앞 트램 정류소로 향했다.

어떤 날은 시간을 맞춰 기다려도 오지를 않았고

어떤 날은 1시간을 기다려도 도무지 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정말 이렇게 타보지도 못하고 끝나는 걸까.     


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어느새 떠나기 전날, 마지막 아침이 찾아왔다.

유난히 오늘 아침따라 가뿐하게 눈이 떠졌다.

억수같이 쏟아붓던 지난밤의 비 덕분인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르기만 하다.


바로 오늘 같은 날이다.

푸른 빛깔이 말없이 하늘을 가득 채우는 날,

낡은 트램을 타고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그저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그런 날.  


이름 모를 종착역에 떨리는 두 발을 내딛고 부풀어 오른 설렘을 실은 낯선 공기를 마시고 싶은 날.

시시콜콜한 농담이 오가고 짧은 웃음소리들이 사그라질때면 쨍한 햇살이 트램 안으로 스며들고 함께 따스한 바람에 내 마음을 내려놓고 싶은 날.



오늘만큼은 제발 탈 수 있길 바라며 다시금 정류소로 향했다.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맞춘 탓에 이미 정류소엔 출발직전의 트램이 멈춰 서있던 참이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력질주를 한다.

단숨에 정류소까지 달려오자

다행히 이제 막 출발하려던 기사 아저씨께서

환하게 웃어 보이며 티켓을 끊어주신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트램 안으로 들어섰다.

이른 시간이었던 탓인지, 혹은 평일인 탓인지,

혹은 떠나기 전 마지막 날에 대한 하늘의 배려 덕인지,

나는 그렇게 오랜 시간 마음에 품었던 트램에

드디어 올라탈 수 있었다.


따뜻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원목으로 채워진 트에선 기분 좋은 나무 냄새가 피어올랐다.

따스한 햇살은 한가득 머금은 붉은빛의 의자들 사이로 몇 개의 빈자리가 놓여있었다.


설레는 마음을 꼭 쥔 채, 창가 바로 옆자리로 다가가 앉았다.

- 끽끽

램은 어김없이 기분 좋은 낡은 소리를 내며

이내 달릴 준비를 한다.    



열어놓은 창문 틈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머리를 내민 하늘 위에는 달린 보람을 느끼게 해주려는 듯

푸른 하늘과 눈부신 햇살이 한껏 반겨주고 있었다.


강가를 따라 달린다.

정신없이 지나다니는 차들과

천천히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트램은 그렇게 천천히 또는 빠르게 포르투를 달다.



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색 바랜 파스텔톤의 건물들이 잔잔한 강물에 비 묘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다.         


요란하게 덜컹거리는 소리에도

마음만은 한없이 평온하게 잦아든다.

나른하게 젖어든 오전의 한때가

바람을 따라, 강물을 따라,

달리는 트램을 따라 슬며시 녹아들고 있다.    

 


20분간을 달리니 

이름모를 한적하고 널따란 해변 앞에 도착했다.

길쭉길쭉한 야자수가 거리마다 무성히 세워져 있고

몇몇 아저씨들은 무심히 낚싯대를 던지고 계셨다.


이곳에선 아무도 소리 내지 않는 듯,

아무런 걱정과 고민도 남기지 않은 듯,

천천히 걷고 멈추다 다시 돌아서서 걷는

조용한 여유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을 맞으며 한적한 거리를 걸어본다.

흔들리는 나무와 바람, 그리고 짙은 햇살만으로도

이 시간을, 이 여유를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


- 끼룩끼룩

갈매가 하늘 위를 날아간다.

수많은 갈매기들이 넓은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을 날고 있다.

그러다 문득 내 앞에 다가와 다.

짧은 시간을 가만히 앉아 있다가

또다시 저 멀리 하늘 위로 날아간다.   



조용히 불어 드는 바람에 발걸음을 맞추며 걸었다.

커다란 등대를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없이 거닐었다.

걷기만 했을 뿐이건만,

어느새 넉넉하게 차오르는 여유로움이 

저 먼곳에서부터 소리없이 나부낀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트램 정류소로 향했다.    

제시간에 맞춰 도착한 트램은 더없이 한적했다.     

돌아가는 트램에 앉아 그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더디게 흘러가는 하루.

트램을 타고 달리는 그 순간부터

나의 포르투는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포르투의 트램을 따라,

포르투의 강변을 따라,

포르투의 낭만을 따라,

나는 천천히 달렸고

하염없이 느긋하게 걸었다.   


단지 조그마한 트램이 예뻤을 뿐이다.

포르투의 색 바랜 건물들 사이를,

반짝이는 강변을 따라 달릴 트램이 

그저 아름다워보였을 뿐이다.



'저 트램을 타고 달리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니, 어쩌면 상상했던 순간보다 훨씬 더

가슴 벅찬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꿈꿨던 순간보다 더욱 꿈만 같은 지금 이 순간.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면,

그 사이로 바람이 선선하게 드나들고

딱히 해야 할 무언가가 정해지지 않은

나른한 오후면,        

  

나는 언제고 또다시 강변을 거닐다

기분 좋은 세월의 냄새를 가득 담은

낡은 낭만이 끝없이 나부끼는 이곳에서

포르투의 트램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2017. bonita All Rights Reserved.


          구독과 공유는 작가에게 희망입니다 :D 

매거진의 이전글 달콤한 술 한잔을 따라가는 여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