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nita Mar 10. 2017

비로소 남미 여행이 시작되었다

#03.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실은 남미로 향한 첫 발걸음이 아르헨티나였던 것은 아니었다.

스페인 마드리드 공항에서 브라질로 들어갔으니 남미와 처음 만난 곳은 브라질이 맞았다.   

  

그럼에도 남미와의 첫 대면에 긴장한 탓인지 혹은 설렜던 탓인지

브라질로 들어간 순간, 그곳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보낸 짧은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가버렸고

남미에 와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나는 다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만 했다.   


어쩌면 내 욕심이었을까.  


막연하게 남미를 여행하게 된다면 

분명 내가 여행했던 그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한

전혀 다른 것들을 만나게 될 거라 생각했다.

남미니까.


내가 살던 한국과도 그리고 익숙한 듯 편안했던 유럽과도 전혀 다를 거란 기대를 터무니없이 키워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어쩜 사람 사는 게 그렇게 다 똑같은지.

지구 반대편까지 돌아와서 마주하게 된 모습은 묵묵히 주어진 하루를 시작하고 그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은 행복들을 찾아 열심히 하루를  채워가는 그들의 뜨거운 일상이었는데 말이다.

그 사실을 조금 늦게 알아차린 탓이었다.


어떠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평탄하게 흘러가는 하루가 오히려 낯설기만 했다.

그 어디를 가도 남미에 왔다는 사실을,

여기가 바로 남미야!라는 당찬 비명을 지를만한 무언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어느새 남미 여행을 시작한 지도 1주일이나 흘렀건만,

여전히 이전의 여행과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한 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나는 날이 밝았다.


여름의 시작답게 30도를 우습게 넘겨버리는 쨍쨍한 하늘을 머리 위에 두고 공항으로 향한다.

아르헨티나 이과수의 공항은 작은 시골마을의 공항을 연상케 하듯 소박하고 아담했다.     


며칠간 입에도 못 댄 진한 커피 한 잔을 홀짝홀짝 마시며 시간을 본다.

곧 게이트가 열리고 비행기 탑승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고,

작은 가방 몇 개를 들고는 곧장 줄을 서 비행기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타고 갈 비행기는 가운데 통로를 기준으로 양옆에 3자리씩 놓인 작은 비행기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조금 여유롭고 느긋한 아침을 보내겠다 지쳐있는 몸을 달래는 사이,

비행기는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출발을 알린다.     


드디어 비행기가 두 바퀴를 떼고 하늘을 날았다.

2시간이 채 안 되는 짧은 비행인 탓에 눈 붙이길 포기하고

수첩을 꺼내 이런저런 생각을 끄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1시간쯤 지났을까.

갑자기 비행기가 정신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문제가 생겼음을 알리는 알람 소리와 함께 기내에 불이 켜지더니 

안전벨트를 착용하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모두가 긴장된 자세로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심상치 않았다.

매번 비행기를 탈 때마다 무심코 흘러 넘긴 비상상황 대처행동의 매뉴얼들이 떠올랐다.

매번 봐도 명확히 이해가 되기는커녕 의례적인 절차로 그저 넘겨버리기 일쑤였다.

과연 내게 그 비상상황이 찾아오겠느냐는 안일한 안전불감증에 사로잡혀 주의 깊게 보려고조차 하지 않았기에 더욱 그러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정말 그 상황이 나한테 온 거라고?!


위아래로 흔들리며 요동치는 비행기는 내 심장을 쪼글아틀어놓았다가는 이내 터져버릴 듯 커다랗게 부풀려놓기를 반복했다.

나도 모르게 점점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고,

상상하고 싶지 않은 아찔한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여기서 추락하면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불안함에 피어오르는 답도 나오지 않는 허망한 질문을 삼켜버리고

단단히 고정된 안전벨트를 몇 번이고 확인하며 그저 아니길, 무사하길 바랄 뿐이었다.    

 


그 사이 놀란 내 모습이 아마도 옆자리까지 느껴졌던 모양이다.

옆에 앉아계시던 아주머니께서 슬쩍 말을 건네신다.     


"괜찮아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길에는 간혹 기류 변화가 심해서 이러곤 해요.

그래도 걱정은 말아요!

비행엔 아무 문제없으니까요!"     


아주머니께선 따스한 눈빛과 함께 침착한 목소리로 나를 다독이셨고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평온한 미소마저 지어 보이셨다.


이 상황에 이토록 안정된 모습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건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통 감이 오질 않았다.

이미 사색이 되어있는 몇몇 여행자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위험천만한 상상들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으니 말이다.     


이런 불안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행기의 흔들림은 점점 더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밑으로 뚝 떨어지는가 싶더 다시 위로 붕 뜨는 느낌을 쉴 새 없이 느끼는 사이,

몇 줄 앞에 앉아계시던 아르헨티나 아주머니들께서 이야기를 나누시다

불현듯 비행기가 떠나갈 듯 커다란 박장대소를 하시는 게 아닌가.


이 상황에 박장대소라니?!

몇몇 사람들도 황당했는지 곳곳에서 실소가 터져 나온다.

그 순간 나는 옆에 앉아계신 아주머니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말이 안 되는 상황에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보며 이번엔 조금 더 명확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와 여전히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말씀하셨다.

"저것 봐요! 좋아요 좋아,

이 정도면 아주 괜찮은 거래두요!"

   

어떻게든 불안한 내 마음을 진정시켜주시기 위해 몇 번이고 건네주시는 따뜻한 다독임

꾸역꾸역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려보지만,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 몸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간절한 기도로 두 손을 모으며 30여분이 흐르도록 끈질긴 정신력과의 사투를 벌인 끝에,

드디어 착륙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고

거짓말처럼 비행기의 두 바퀴는 무사히 아르헨티나의 땅에 닿았다.     


그 순간 비행기 안에선 우레와 같은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모두가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에,

살아있다는 사실에,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와 환희가 뒤엉킨 박수갈채를 쏟아낸다.



"이게 바로 아르헨티나 사람들이죠!"

마지막까지도 놀란 내 마음을 쓸어내 주시며

눈을 찡긋해 보이시는 아주머니를 보니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였고 이내 안도의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네요, 이제 정말 아르헨티나에 왔나 봐요!"

긴장이 풀렸는지 미처 내뱉지 못했던 감사했던 마음까지 전해 보이며 드디어 아찔했던 비행도 끝이 났다.


비행기에서 서둘러 나와 잠시 멈춰 서서

손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땀을 털어내며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다시 내뱉는다.

이거 원, 도착부터 쉽지가 않다.

아무래도 이제부터 시작될 여행이 만만치 않으려나 보다.     


마음을 다잡고 짐을 찾아 밖으로 나오자 험난했던 비행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거침없이 불어대는 비바람에 나무란 나무는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고

더불어 번쩍번쩍하는 번개와 요란한 천둥소리는

도착하자마자 반겨주는 부에노스아이레스와의 첫 만남이라기엔 너무나 가혹했다.    

 


숙소로 가는 버스 티켓을 끊어두고는

바람이 몰아치는 스산한 날씨 앞에 서서 버스가 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쌀쌀한 날씨 탓에 손가락까지 시려오는데도

버스는 도통 올 기미조차 보이질 않는다.


주변에 함께 기다리던 사람들도 하나둘 마중 나온 가족과 친구들의 품에 안겨 돌아가고 있었다.

어느새 30분이 지나자 기다리고 있던 곳에 남은 사람은 나를 포함해 3~4명 남짓이 전부였다.  

    

멀리 서 온 아들과 손주를 보기 위해 마중 나오신 할아버지도

짐을 실어주며 오랜만에 만나는 딸과 뜨거운 포옹을 하는 부모님들도

하나같이 따스한 그 모습들을 보는 내내 괜스레 마음 한켠이 간질거려 계속해서 눈길이 머문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엔 우리 부모님도 날 보고 저렇게 기뻐하시겠지,

저렇게 따뜻하게 안아주시겠지라는 생각 문득 가슴이 찡해자 서둘러 머물렀던 눈길을 거둔다.     



아무래도 죽을 고비를 넘겼던 탓일까 마음이 조금 고되긴 했나 보다.

잠시나마 돌아갈 내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직 해야 할 것도, 해보고 싶은 것도, 걸어가야 할 길도 이토록 많이 남았는데

벌써 그 시간을 상상할 수는 없었다.

벌써 그립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아직은 그럴 수 없었다.     


몸도 마음도 점점 추위에 지쳐가고 있을 때,

버스 티켓을 끊어주었던 직원이 다가와 아직까지 차를 안 타고 있었냐며

내 손을 붙잡고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던 기사 아저씨에게 데려다주었다.  


버스인 줄 알았건만 택시와 동일한 형태인 탓에 밖에서 기다린 30분이 허무하게 흘러가버렸지만

잠시나마 따뜻했던 모습을 두 눈에 담은 것으로 그리운 마음을 대리 만족하며 집으로 향한다.


차창을 때리는 거센 빗소리를 따라 편안하게 기대어 집으로 가는 길, 

차 안에서는 기어이 아르헨티나에 도착했음을 느끼게 해 줄 노래 한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혼미했던 정신에 내가 어디에 와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그때,

그 노래는 멍하니 있던 나를 깨웠다.

안에서 울려 퍼지는 슬픈 듯 잔잔하면서도 강하고 힘이 넘치는 노랫소리는 세차게 쏟아붓는 빗소리를 반주삼아 더욱 묘하게 어우러졌다.


이내 아저씨는 볼륨을 조금 더 키우신다.

    


창밖에선 하염없이 천둥과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고

구슬픈 멜로디는 마치 빗소리를 모두 집어삼키려는 듯 더욱 애절하고 강렬하게 이곳을 에다.       


빗물을 가로지르며 뻥 뚫린 도로를 시원하게 내달린다.  

순조롭게 지나가는 것 같으면서도 예상치 못한 일들이 발목을 붙잡기도 하고,

복잡한 밧줄에 엉켜있는 것 같으면서도 자연스레 흐름을 따라 흘러가는 하루.   

  

어쩌면 이러한 모습이 남미를 여행하며 마주치게 될 일상이 아닐까.

그 흔한 인터넷이나 가이드북에서조차

원하는 정보 하나 찾는 게 쉽지 않고

그 나라의 말이 아니라면 어떠한 언어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미리 찾아보고, 알아보고, 모든 걸 준비하고 시작할 수 없는 여행.


결국 내 몸으로 직접 부딪히고 걸어보고 

찾아 나설 때야 비로소 보이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내 발걸음이 닿는 순간 시작되는 여행
내가 움직임으로써 완성되는 여행


나는 그런 여행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그 시작을 만났는지도 모르겠다.     


어렵게 마주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말을 건넨다.

이제 드디어 남미의 시작이라고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