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나의 사랑은 소중해
얼마 후 미리내는 지우가 머무는 유진의 숙소에 그가 없는 틈을 이용하여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대로 유진은 없었지만 대신 4대 천왕들이 사방에서 지우를 경호하고 있었다. 미리내는 그녀를 예리하게 훑어보는 4대 천왕들의 눈빛에 저절로 주눅이 들었다.
(쳇, 지우 저년을 죽이고 싶어도 틈이 없군)
한편 지우는 뜬금없는 미리내의 방문에 매우 놀랐다.
“당신은?”
“나는 유진 씨를 사랑하는 미리내요.”
미리내는 처음부터 대담하게 치고 나왔다.
“뭐, 유진 씨를 사랑한다고?”
지우도 이게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냐는 듯 즉각 적개심을 드러냈다. 대뜸 선공(先攻)을 날렸던 미리내는 더욱더 가열하게 지우를 공격했다.
“그러니까 너 당장 유진 씨 옆에서 떨어져!”
“네가 뭔데 나보고 이래라 저래라야!”
저돌적인 미리내에 제대로 열받은 지우도 평소와는 달리 세게 받아쳤다. 그러자 미리내가 안 됐다는 듯 혀를 찼다.
“내가 너를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
“나를 잘 안다고?”
“그래. 너는 정말 원래 착한 여자니까.”
어린아이를 달래듯 미리내의 목소리가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원래 착하다고?”
지우가 불쾌하면서도 경계하는 표정으로 되묻자, 미리내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한발 다가섰다.
“지우, 내가 재미있는 비밀 하나 알려줄까?”
“대체 그게 뭔데 이렇게 뜸을 들여?”
“지우, 슈퍼 다이아몬드에 관한 것이니까 잘 들어라.”
미리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건 지우도 마찬가지였다.
“슈퍼 다이아몬드?”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처럼 보이는 슈퍼 다이아몬드의 치명적인 약점이 뭔지 알아?”
“약점?”
약점이라는 말에 지우의 눈빛이 긴장했다.
“그래. 슈퍼 다이아몬드는 화성(華城)을 33일 동안 벗어나 있으면 스스로 파괴된다는 것이 최대약점이지. 후후,”
미리내는 엄청난 비밀을 터뜨리고 승기를 잡았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뭐라고?”
충격을 받은 듯 지우의 목소리가 경직되었다.
“그것을 알아낸 우리 아빠가 너를 꼬드긴 거야. 그것을 그레이트사 공장에 갖다 놓으라고, 그리고 멍청한 너는 그것을 해독제 하고 바꿔 먹었지.”
미리내의 연이은 폭로에 지우의 얼굴이 하얘졌다.
“뭐라고? 그게 사실이야?”
“믿든지 말든지 네 자유야.”
미리내는 실컷 지우를 뒤흔들어놓고는 슬쩍 물러서며 지우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지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중대한 비밀을 나에게 털어놓는 이유가 뭐지?”
지우의 본질적인 물음에 미리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본색을 드러냈다.
“그건 너에게 선택할 시간을 주려는 나의 자비심 때문이지.”
“선택?”
“그렇지. 너의 저급한 사랑을 위해 화성(華城) 제국과 그 백성들을 모두 멸망하게 할 것인지 아니면 애정행각을 포기하고 슈퍼 다이아몬드를 제자리에 돌려놓을 것인지 선택을 하라는 말이야!”
미리내가 대목 대목 힘주어 설명하자 지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은 유진과 헤어지라는 협박이군.”
지우의 말에 미리내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눈치 하나는 기막히게 빠르군. 자, 이제 선택은 너에게 달려 있어. 우리 착한 지우가 만인들을 위해서 현명하게 선택하리라고 나는 생각해. 기대해도 되지?”
“......”
미리내의 친절한 강요에 지우는 애써 침묵을 지켰다. 미리내가 의기양양하게 돌아간 뒤에도 그녀의 침묵은 계속되었고 얼굴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자신의 선택에 화성(華城) 제국의 흥망이 걸려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진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6월 19일 아침 지우는 밤새 고민을 한 탓인지 얼굴이 부쩍 야위었다. 그녀는 대마령과의 약속 시간이 다가오자 슈퍼 다이아몬드를 보석 상자에 담아 천왕들과 함께 공동 감시지역으로 지목된 더그레이트사 공장 부지로 나갔다.
그곳에는 수천 마리의 흡혈박쥐들이 공장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지우 일행의 움직임을 삼엄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2시가 되자 대마령도 측근들의 호위를 받으며 현장에 나타났다.
(......!)
지우가 공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가장 놀란 것은 그녀를 원격 조정하려고 했었던 미리내였다.
(유진과는 절대 못 헤어진다는 거군. 자신의 애정행각을 위해서는 나라가 망하든 말든 상관이 없다는 거야? 이기적인 계집애! 아, 이제 어떡하지?)
자신이 지우에게 강요한 비책이 전혀 먹혀들지 않자 미리내는 속이 새까맣게 탔다. 어쨌든 그녀는 필사적으로 해결책을 궁리해야 했다.
딸의 그런 어지러운 마음을 모르는 대마령은 만족한 웃음을 흘리며 지우 일행을 안내했다. 잠시 후 그들이 다다른 곳은 커다란 수레 앞이었다. 그 위에 목장에서나 쓸 법한 1미터 높이의 스테인리스 금속 통이 두 개 실려 있었다. 흡혈박쥐들이 그것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보아 그것은 지우가 요구했던 해독제인 것이 분명했다.
“어디 해독제를 살펴봅시다.”
지우는 스테인리스 통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뚜껑을 열고 그 안에 가득 찬 해독제를 확인하였다. 이윽고 그녀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자 대마령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슈퍼 다이아몬드도 가져왔겠지?”
그의 물음에 지우는 들고 있던 보석상자를 높이 들어 보였다.
“물론이지.”
“그럼 그것을 꺼내어 저기에 갖다 놓아라.”
대마령은 매우 상기된 표정으로 공장 부지의 앞쪽에 설치된 연꽃 모양의 제단을 가리켰다. 제단의 주변을 대마령의 부하들과 청랑이 파견한 군사들이 에워싸고 삼엄하게 공동 감시하고 있었다. 지우는 슈퍼 다이아몬드를 보석상자에서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리고 연꽃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 그 위에 슈퍼 다이아몬드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돌아서서 4대 천왕을 불러냈다.
“너희들도 지금부터 저 신물(神物)을 지켜라.”
“네. 명령 받들겠습니다.”
4대 천왕들이 고개 숙여 복창하자 그것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지켜보던 대마령이 다가와서 불만을 터뜨렸다.
“지우, 4대 천왕이 슈퍼 다이아몬드를 지키는 것은 좀 곤란해.”
“곤란하다고? 뭐가?”
지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슈퍼 다이아몬드를 지키는 일은 중립적인 자가 해야 돼. 4대 천왕은 너무 편파적이야.”
“편파적이라?”
“슈퍼 다이아몬드하고 너무 밀착되어 있어. 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대마령은 당장 협상을 깨기라도 할 것처럼 매우 강경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의 강한 불만에 지우는 잠시 고심하더니 4대 천왕에게 돌아섰다.
“좋아, 4대 천왕, 자기들은 빠지고 대신 청랑 오빠가 신물(神物)을 책임지고 공동 감시하세요.”
“그래도 그건,”
지국천왕은 미련이 남은 듯 이견을 달았다. 하지만 청랑은 잽싸게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폐하의 명을 추호의 빈틈없이 수행하겠습니다.”
청랑의 적극적인 태도에 4대 천왕들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날부터 미리내와 청랑의 군사들로 구성된 40여 명의 무장 병력이 슈퍼 다이아몬드를 철통같이 감시하기 시작했다.
한편 해독제를 일부 할당받은 유진은 급히 가희를 찾아 나섰다.
세상의 소리를 모두 감청할 수 있는 다문천왕의 도움으로 그는 시 외곽의 어느 폐가에 숨어 있던 가희를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유진이 급히 해독제를 가희에게 투여하자 그녀의 송곳니가 빠르게 사라졌다. 뱀파이어의 피가 모두 사라진 증후였다. 정상으로 돌아오자 감격에 겨운 그녀는 유진의 품에 와락 안겨서 눈물을 글썽이었다.
“고마워요. 나는 그동안 당신을 그토록 무시하고 구박했는데 나를 이렇게 살펴주다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
“은혜는 무슨, 나는 그저 당신이 불쌍해서 도와주는 거야?”
유진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불쌍해서?”
가희의 눈빛이 순간 굳어졌다. 그것을 감지한 유진이 황급히 말을 정정했다.
“불쌍하기보다는 인류애로 도와주는 거라는 뜻이었어.”
“어쨌든 사랑은 아니라는 뜻이군.”
“......”
가희의 눈치 빠른 해석에 유진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것을 지켜보던 가희는 금방 묘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렇다면 나는 어때?”
가희는 유진에게 눈을 찡긋하며 아리송한 질문을 던졌다. 동시에 가희의 모습이 갑자기 흐물흐물하더니 순식간에 미리내의 모습으로 확 바뀌었다. 뜻하지 않은 그녀의 정체에 유진은 기절초풍했다.
“지금 나를 속인 거야?”
“당신이 나를 기피하니까 어쩔 수 없었어.”
“너는 독기가 서린 꽃이야! 저리 가”
겁에 질린 유진이 뒷걸음질 치자 미리내가 재빠르게 그의 팔을 낚아채 끌어당겼다.
“억울해. 나도 예전부터 당신을 좋아했어!”
미리내는 절규하듯 내뱉고는 대담하게 유진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름다운 미리내의 향기는 유진의 정신을 어지럽게 했고 그녀의 탄력 있는 가슴은 그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이봐요, 왜 이래?”
미리내의 몸에 급반응하는 자신의 몸에 놀란 유진이 얼른 그녀를 떼어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미리내는 더욱 집요하게 그의 몸을 더듬었다. 심지어 그를 더욱 강하게 옭아맸다.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니까요!”
열에 들뜬 듯 미리내의 목소리도 매우 상기되었다.
“나는 이미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고!”
유진은 미리내를 필사적으로 밀어냈다.
“누구? 지우?”
“맞아,”
“아쉽군. 하지만 상관없어. 사랑에는 죄가 없으니까.”
미리내는 지우의 존재에 자극을 받은 듯 더욱 저돌적으로 변했다.
“제발 나 좀 놓아줘.”
마침내 유진이 하소연하자 미리내는 비웃듯이 대꾸했다.
“놓아달라고? 좀 솔직해져요. 당신의 몸을 붙잡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 마음이야.”
미리내는 냉소적으로 지껄였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 유진의 몸은 거부하는 말과는 달리 미리내에게 급속히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몇 초만 더 지나면 아예 유진이 미리내를 덮칠 판이었다.
“후후, 지우가 이런 자기 모습을 보면 아마 대성통곡할 거야. 호호,”
곧 유진의 몸을 취하리라는 자신감에 빠진 미리내는 저도 모르게 자만심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 소리에 몽롱함에 빠지던 유진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저리 비키라니까!”
유진은 다시 젖 먹던 힘을 다해 미리내를 밀쳐냈다. 그 바람에 미리내는 저만치 밀려 나가 나뒹굴고 말았다. 미리내는 땅바닥에 엎어진 채 잠시 꿈쩍도 안 했다. 그녀는 울고 있는 듯했다. 이윽고 그녀는 조용히 일어났다. 급히 눈물을 닦은 듯 얼굴이 얼룩져 있었다. 미리내는 슬픈 눈빛으로 유진을 빤히 쏘아본다.
“유진, 당신은 정말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어.”
“우리는 인연이 아니야. 미리내,”
“그래서 운명으로 받아들이라고?”
유진을 씁쓸한 눈빛으로 혼잣말하던 그녀의 두 눈에 아름다운 독기가 서서히 가득 찼다.
“하지만 나도 안되면 지우 그것도 안 돼!”
유진을 향해 사납게 그 한마디를 남기고 미리내는 훌쩍 몸을 날려 폐가를 빠져나갔다.
그날 밤 슈퍼 다이아몬드를 공동 감시하는 미리내의 군사들 앞에 미리내가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녀를 발견한 소령이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아가씨, 이 야심한 밤에 무슨 일이십니까?”
“.......”
그러나 미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는 슈퍼 다이아몬드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후 미리내가 소령을 향해 돌아서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소령, 지금 당장 저 청랑의 군사를 공격하라!”
“넷? 공격을 하라고요?”
뜬금없는 명령을 받은 소령은 소스라치게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다.”
“그건 대마령님의 명령 없이는 안 됩니다!”
“멍청한 것! 나는 아버지의 명을 받고 온 거야.”
“그게 정말입니까?”
소령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그래. 아버지는 내게 오늘 밤 저 슈퍼 다이아몬드를 완전히 없애버리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그 증표를 보여주시죠.”
소령은 여전히 미심쩍은지 대마령의 명령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러자 미리내가 검을 뽑아 소령의 목을 겨누었다.
“이 멍청이야, 꾸물거리다가 오늘 밤 작전을 다 망쵸! 내 손에 죽고 싶어!”
미리내의 막무가내식 위협에 소령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의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너희들은 당장 저 청랑의 군사를 베어라!”
그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령의 군사들은 반대쪽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청랑의 군사들에게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뜻하지 않은 기습을 당한 청랑의 군사들도 즉각 전투에 돌입했다. 곧 양측 간에 살벌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좋아, 이때다!”
두 군사가 전투에 집중하자 미리내는 연꽃 제단으로 달려가 슈퍼 다이아몬드를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청랑이 깜짝 놀라며 검을 치켜들고 번개처럼 미리내에게 달려들었다.
“감히 신물(神物)을 도둑질해? 죽어라!”
청랑이 사납게 검을 휘둘렀지만 미리내는 한 발 앞서 슈퍼 다이아몬드를 안고 공중으로 비상했다. 그녀는 어느새 하얀색 흡혈박쥐로 변신해 있었다.
“나도 이제 지우처럼 나를 위해서 살 거야!”
미리내는 가슴에 깊이 서린 말을 내뱉고는 어두운 밤하늘을 가로질러 곧장 화성행궁의 지하감옥으로 날아갔다.
그곳은 폐위된 적호왕이 갇혀있는 곳이었다. 미리내는 감옥의 창문 사이로 슈퍼 다이아몬드를 힘껏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온 세상이 다 울리도록 소리쳤다.
“적호왕, 내가 가련한 너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것으로 다시 왕권을 잡아 지우 년을 죽여라!”
그동안 지우에게 왕권을 빼앗긴 원통함에 그날도 잠 못 이루던 적호왕은 뜬금없이 굴러온 슈퍼 다이아몬드를 집어 들고는 크게 환호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고맙소, 당신 소원대로 내 반드시 지우의 사지를 찢어 죽일 것이요!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