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여자의 마음을 빼앗는 사기
다음 날 아침 유진은 요란하게 지저귀는 새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아뿔싸!”
새벽이 되도록 지우를 처리할까 궁리하다가 그만 까무룩 잠이 든 모양이었다.
유진이 벌떡 일어나 골방 창문너머로 건넛방을 엿보니 지우 오빠들은 여전히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가 다시 툇마루 쪽으로 돌아보니 골방 앞을 감시하던 지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아, 이런, "
그는 사당을 털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를 날린 것이 너무나 분하고 원통했다. 그렇다고 마냥 가슴만 치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살인자들이 깨어나기 전에 사당을 뒤져 볼 생각에 그곳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 오는 듯한 발소리가 들렸다.
“이크,”
유진은 서둘러 옆에 있는 대나무 숲에 몸을 숨겼다. 청파가 자주색 작은 소반을 조심스럽게 들고 사당을 향해 걸어가고 그 뒤를 황호가 뒷짐 지고 따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침 공양이라도 하나? 휴, 생각보다 사당 접근이 쉽지 않네.”
상황이 여의치 않게 돌아가자, 유진은 탄식했다. 그리고 잠시 어찌할지 생각하던 유진은 대나무 숲에서 빠져나와 골방 옆 좁은 통로를 따라 걸어갔다.
그곳을 벗어나자 곧바로 작은 사립문이 보였다. 사립문 밖은 황톳길이었다. 유진은 이왕 밖으로 나온 김에 나중에 도주할 때를 대비해서 주변 지형이나 미리 답사해 보자는 생각에 주변을 유심히 살피며 터덜터덜 걸었다.
“……!”
유진이 30미터 정도를 걸었을 때 그의 눈에 지우가 머리에 노란색 양은 양동이를 이고 걸어오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유진과 자기 오빠들이 잠에 곯아떨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그사이에 물을 길어오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녀의 모습은 요즘 도회지에서는 보기 힘든 매우 목가적인 광경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우가 문득 다루기 쉬운 여자로 보였다.
“흠, 차라리 저 여자를 살살 구워삶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은데. 흐흐,”
악마적인 웃음을 짓던 유진은 얼른 선한 표정으로 바꾼 후 뛰어가 그녀 앞에 우뚝 섰다. 지우는 유진이 갑작스럽게 나타나자 매우 놀랐는지 멈칫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곧 반색했다.
“어마, 다행히 깨어났네.”
예쁘게 생긴 외모만큼이나 매우 맑은 목소리였다.
“미안합니다. 신세를 졌네요.”
“그럼 빨리 이곳을 떠나세요.”
지우는 유진이 건재한 것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태도를 바꾸어 냉정하게 재촉했다.
“아침도 안 먹고요?”
유진은 짐짓 배고픈 표정을 지어 보이며 지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역시 매우 투명했다.
“지금 아침이 문제예요?”
“그래도 난 배고픈 것은 못 참아요.”
“참 대책 없는 분이군요. 휴,”
지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밤새도록 불침번을 서고도 피곤하지 않으세요?”
“전 괜찮아요.”
지우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하자 유진이 정색하고는 물었다.
“그런데 뭣 때문에 불침번을 섰던 거죠?”
유진의 직설적인 질문에 지우는 난처한 듯 선뜻 대답을 못했다.
“그건 불침번을 선 것이 아니라 마침 일거리가 많아서 그런 거예요.”
지우는 뻔한 거짓말을 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그러자 유진이 얼른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꼭두새벽부터 어디를 갔다 오는 거죠?”
“약수를 떠 오는 중이에요.”
지우도 난처한 질문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지 이마에 흘러내린 물방울들을 손으로 훔쳐내며 살갑게 대답했다.
“약수요?”
“네. 저기에 약수터가 있어요.”
지우는 오던 길을 살짝 돌아보며 대답했다.
“아니, 여기는 수도가 없어요?”
“아직,”
지우는 그 대목에서는 좀 창피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답지 않게 목소리를 죽였다.
지우가 갑자기 의기소침해지자 유진은 아차! 싶었다. 지우를 잘 구슬려도 모자랄 판에 엉뚱하게도 지우의 자존심이나 긁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유진은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지우의 구겨진 자존심을 어떻게 달래 줄까 전전긍긍하던 유진은 문득 그녀가 머리에 이고 있는 양동이를 바라본다.
“아참, 그 양동이 매우 무겁죠? 내가 들어줄 테니 이리 줘요.”
유진은 어떻게 하든지 지우의 환심을 사고 싶은 마음에 양손으로 양동이를 덥석 쥐었다.
“아, 괜찮아요.”
하지만 지우는 유진의 친절이 부담스러운지 극구 사양했다. 그래도 그는 계속 고집을 피우며 옥신각신하다가 끝내 지우의 양동이를 억지로 빼앗았다. 하지만 그 순간 양동이가 너무 무거워서 그는 그것을 놓치고 말았다.
“와당탕!”
양동이는 땅바닥에 사정없이 엎어지면서 안에 있던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삽시간에 양동이에는 물이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머나, 이를 어째?”
지우는 텅 빈 양동이를 집어 들고 탄식하며 울상을 지었다. 뜻밖의 사태에 매우 난감한 유진은 얼굴을 붉히고 어쩔 줄 몰라했다.
“아, 이런, 미안해요.”
“그러기에 왜 자꾸 일을 만들어요?”
유진을 쏘아보며 내뱉은 지우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묻어났다. 그 순간에도 유진은 마주친 지우의 투명한 눈이 아찔할 정도로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지우도 그것에 매료된 유진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더 어색해진 유진도 얼른 시선을 양동이로 돌렸다.
“제가 다시 떠올게요.”
“됐다고요!”
지우가 굳은 얼굴로 날카롭게 대꾸했다. 그래도 유진은 구겨진 남자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양동이를 얼른 잡아채고는 지우가 왔던 길로 무작정 뛰어갔다.
“약수터가 어디인지도 모르잖아요! 같이 가요.”
결국 지우가 어쩔 수 없이 유진을 쫓아가며 소리쳤다.
이윽고 약수터에 도착한 유진은 양동이에 물을 가득 받았다. 물이 다 채워지자, 그는 남자의 힘을 과시하겠다는 듯 물동이를 다시 한 손으로 번쩍 들려고 했다. 그러나 물의 무게가 생각보다 꽤 무거워서 그는 비척거렸다. 곁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지우가 한숨을 쉬며 나섰다.
“비켜요. 제가 그냥 이고 갈게요.”
“아니, 내가 들고 갈게요. 최소한 밥값은 해야죠.”
그는 지우를 밀쳐내고는 양손으로 양동이를 겨우 들고 비틀비틀 걸어갔다. 그러다가 또 와당탕 넘어질 뻔했다. 그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한 지우가 얼른 달려들어 양동이의 손잡이 한쪽을 잡아 쥐었다.
“그럼 같이 들고 가요.”
유진도 더 이상 거부를 못 하고 양동이를 같이 들고 갔다. 그런데 양동이가 두 사람의 다리에 이리저리 자꾸 부딪히는 바람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양동이를 매점까지 겨우겨우 들고 왔다.
그때 마침 부엌에서 나오던 청파는 유진과 지우가 양동이를 함께 들고 오는 광경을 발견하고는 호들갑을 떨었다.
“아유, 언제 일어났어요? 방에 없길래 난 그냥 떠난 줄 알았어요.”
“잠깐 산책 좀 했어요.”
유진의 궁색한 변명에 청파는 새삼 주위를 둘러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여기는 혼자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돼요.”
“지우 씨가 물 떠 오는 것을 잠깐 도와주었어요.”
“그랬어요?”
“둘이 같이 드니까 하나도 안 무겁군요.”
유진이 너스레를 떨며 허풍을 떨자, 청파는 지우에게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둘이 들었어?”
어미의 의미심장한 질문에 지우는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되었어.”
“뭐가?”
청파는 장난기 어린 시선으로 딸의 얼굴을 살펴보다가 문득 양동이를 들여다보고는 일부러 깜짝 놀라는 체한다.
“애걔! 물이 반밖에 안 되네.”
“그, 그게.”
지우가 답변이 궁한 듯 우물쭈물하자, 청파는 양동이의 밑을 보더니 금방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양동이는 왜 찌그러졌어?”
“제가 들고 오다가 땅에 떨어뜨렸어.”
“네가?”
청파는 지우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본다. 그러고는 곁눈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유진을 훔쳐보고는 대충 상황을 알겠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래. 조심해야지.”
청파는 양동이가 찌그러졌는데도 왠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황호가 방에서 나왔다. 청파는 그에게 쪼르르 달려가 유진과 지우의 일을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잠시 후 노부부는 각각 유진과 지우를 향해 두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내며 박장대소했다.
“지금 두 분 뭐하는 거예요?”
다소 장난기가 섞인 부모의 모습에 지우는 얼굴을 붉히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발끈했다 .하지만 유진은 왠지 지우 부모가 자기를 적극 도와주는 것 같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