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혁명과 반전의 소용돌이
그 살벌한 광경에 지우는 황급히 적호왕에게 엎드려 읍소했다.
“폐하, 유진 저 사람은 이번 신물(神物) 회수 작전에서 사경을 헤매던 저를 구해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저도 신물(神物)을 다시 회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적호의 반응은 냉랭했다.
“긴말 필요 없다. 네 정인의 목을 베어 너의 깊은 충성심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적호왕은 막무가내였다. 절망감을 느낀 지우는 자신 앞에 놓인 검을 노려보며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그녀의 긴 침묵에 유진은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 지우, 설마 날 정말로 죽이는 거 아니지?”
“……”
하지만 깊은 고뇌에 빠진 듯 지우는 선뜻 확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을성 없는 적호왕의 군사들은 지우를 더욱 압박하려는 듯 지우 가족들의 목을 겨누고 일제히 검을 치켜들었다. 그들의 살벌한 기세에 질겁을 한 지우 오빠들은 이구동성으로 울부짖었다.
“지우야, 빨리 그놈을 죽여! 어서! ”
“지우야, 난 죽기 싫다고!”
오빠들의 겁먹은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지우는 속으로 여전히 격렬한 갈등을 겪는지 침묵을 지키며 우두커니 무릎 꿇고 있을 뿐이었다. 땅바닥에 놓인 검을 쏘아보는 그녀의 눈에서 불현듯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
잠시 후 그녀는 결단을 내린 듯 검을 집어 들고 조용히 일어나 적호왕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예전에 나의 약혼자 화랑이 말하기를 영생(永生)은 중생(衆生)을 무감동(無感動)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경고했었지.”
“반역자 화랑이 왜 갑자기 거기서 튀어나와?”
적호왕은 자기가 오래전에 처단했던 반역자 화랑의 이름이 지우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매우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지우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속내를 밝혔다.
“그 사람은 그러고는 영원히 아무런 변화가 없는 이 지루한 세상을 뒤엎고자 혁명을 일으켰지. 물론 그때 나는 그의 위대한 혁명을 이해 못 하고 어리석게도 그 사람을 죽게 만드는 우를 범했다. 하지만 지금은,”
넋두리처럼 독백하던 지우가 갑자기 눈빛을 이글이글 눈빛을 적호왕에게 대담하게 다가갔다. 흠칫 놀란 적호왕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위대한 혁명? 그것은 반란이었다!”
“아니요. 그건 미증유(未曾有)의 혁명이었어.”
“지우, 너 설마 지금 그 반란에 동조하는 것 아니지?”
“동조가 아니라 혁명을 시작하는 거야. 이제는 내 손으로 직접!”
지우는 들고 있던 검을 손으로 쓱 훑으며 선언했다. 적호왕은 지우의 입에서 혁명이라는 소리가 튀어나오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혁명? 웬 헛소리냐?”
“자비도 없고 감동도 없는 자!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안 변했어. 하긴 변할 필요가 없겠지. 이 영생의 세상에서는!”
지우는 절규를 하듯 내뱉고는 재빠르게 적호왕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네년이 정녕 짐의 칼에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비로소 지우의 의도를 알아챈 적호왕이 얼른 자기 검으로 지우의 검을 막으며 소리쳤다. 적호왕을 쏘아보는 지우의 두 눈에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적호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무자비해. 하지만 오늘은 네 마음대로 안 될 것이다!”
“뭐라고? 네년이 오늘 제대로 미쳤구나!”
어느새 적호왕의 두 눈에도 분노가 가득 찼다. 하지만 지우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씩 웃더니 들고 있던 검으로 적호왕의 검을 거칠게 밀쳐냈다.
“그래. 오늘 제대로 한번 미쳐보자! 오늘부로 나는 어리석고 무자비한 적호 당신을 폐하고 내가 이 제국의 주인이 될 것이다!”
“뭐라고?”
그제야 지우의 결단을 알아챈 적호왕은 황급히 군사들을 돌아보며 명했다.
“뭐 하느냐? 당장 저 반역자 지우를 참살하라!”
적호왕의 명령에 군사들은 지우를 향해 벌 떼처럼 덤벼들었다. 그러나 지우는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왼손으로 슈퍼 다이아몬드를 하늘 높이 치켜들고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4대 천왕들이여! 화성(華城) 제국의 새로운 주인이 된 나를 수호하라!”
그녀의 호령이 허공을 가르자마자 4대 천왕이 각각 수많은 권속을 이끌고 지우 앞에 나타났다.
“명령 집행하겠습니다!”
수천 명에 달하는 야차와 나찰은 각기 병장기를 앞세우고 적호왕의 부하들을 향해 다가섰다. 그들의 소름 끼치는 무서운 형상에 적호왕의 군사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뒷걸음질 쳤다.
“물러서는 놈들은 내 칼에 죽는다!”
적호왕의 으름장에 군사들은 다시 창칼을 앞세우고 4대 천왕의 권속들을 향해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야차와 나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적호왕의 군사들은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거의 전멸되고 겨우 살아남은 패잔병들도 모두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기고만장했던 화산도 그들 틈에 섞여 어디론가 도주해 버렸다.
이윽고 적호왕은 나찰 무리에게 사로잡혀 처량한 모습으로 지우 앞에 끌려왔다.
“지우, 감히 네가 반란을 일으키다니……”
“적호,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결국 당신의 무자비 때문이니까.”
지우는 적호왕에게 차갑게 쏘아붙이고는 4대 천왕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자를 행궁의 지하 감옥에 감금하라!”
“네.”
4대 천왕들의 권속들이 즉시 적호왕과 그의 측근들을 포박하여 행궁의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갔다. 그들의 모습을 놀란 시선으로 바라보던 유진은 지우에게 달려가 말했다.
“살려 주어서 고마워. 아까는 진짜로 죽는 줄 알았어. ”
“미운 정도 정이라고 당신을 그냥 죽게 만들 수는 없었어.”
“에이, 그냥 내가 좋아졌다고 실토하시지.”
“신소리!”
“아니면 그때 내 키스가 진짜로 맘에 들었었나?”
유진이 계속 농담을 하자 지우는 정말 어이없다는 듯 쏘아붙였다.
“그깟 키스가 뭐 대수야!”
“그때 지우의 입술도 화산처럼 뜨거웠었어.”
“헛소리 말아요!”
“알, 알았어.”
유진은 지우가 발끈하자 모처럼 좋아진 사이가 다시 틀어질까 봐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때 지우 오빠들이 그녀에게 달려와 그녀의 손을 붙잡고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었다. 잔뜩 들뜬 백랑이 기대가 가득한 표정으로 지우에게 물었다.
“지우야, 네가 이제 이 화성(華城) 제국의 여왕이 된 거야?”
“맞아요.”
“그럼, 우리를 제국의 대장군으로 임명할 거지?”
“……!”
지우는 느닷없는 백랑의 요구가 매우 난감한 듯 얼른 대답을 못 했다. 김칫국부터 미리 마시는 오빠가 안쓰러워서 그런지 지우는 딱 잘라 거부를 못하고 좀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일단 슈퍼 다이아몬드를 제자리에 갖다 놓고 천천히 생각해 보죠.”
“야호! 고맙다!”
백랑이 지우의 말에 당장 대장군이 된 것처럼 환호성을 지르자, 다른 오빠들도 샘이 나는 듯 얼른 끼어들었다.
“지우야, 나도 부탁해!”
지우의 오빠들이 야단법석을 피울 때 그들을 새삼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유진은 지우에게 뜻밖의 소리를 했다.
“지우, 이제 난 집으로 돌아갈 거야.”
그의 말에 지우는 뜻밖이라는 듯 깜짝 놀랐다.
“자기 집? 시내로 돌아간다는 말이야?”
“응.”
“아니 갑자기 왜?”
“내가 너무 오랫동안 집을 나와 있어서 식구들이 걱정할 거야.”
“정말 그게 진짜 이유야?”
“그래.”
“자기, 그냥 나랑 여기서 같이 있으면 안 돼?”
웬일인지 지우는 누가 보아도 민망할 정도로 대담하게 유진에게 매달렸다. 어느새 말투도 연인들 사이처럼 달달하게 바뀌어져 있었다.
“……”
자신의 요청에도 유진이 선뜻 대답을 안 하자 지우는 바짝 조바심을 냈다.
“나는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적호마저 폐위시켰는데 집에 돌아간다니……내 마음 정말 모르겠어?”
지우는 공치사까지 하면서 그를 붙잡으려고 했었다. 지우는 그게 진심이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고마워. 하지만……”
유진은 고맙다고 하면서도 팔달산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무섭다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모든 것이 현실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었다. 지우의 정체도 무섭도록 궁금했다. 그중에서도 그는 지우 오빠들이 제일 무서웠다. 이제는 다이아몬드고 뭐고 빨리 팔달산에서 도망치고만 싶었다.
그와는 달리 바짝 몸이 단 지우는 문득 유진을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 다이아몬드라는 것을 깨달은 듯 급히 말문을 열었다.
“내가 약속했던 여섯 개의 다이아몬드를 만들려면 시간이 좀 걸리는데 그때까지 기다려야 하잖아.”
“아니. 그것은 나중에 주어도 돼.”
유진의 예상치 않은 대답에 지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자기는 이제 다이아몬드에 대해서도 욕심을 버린 거야?”
“응.”
“정말?”
“응. 지우를 구할 때 어느 정도 욕심을 버렸어.”
“정말이야?”
지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에게 물었다.
“슈퍼 다이아몬드를 서로 차지하려고 지금껏 얼마나 참혹한 싸움이 벌어졌어? 나도 그 싸움에 끼어들면 결국 내 명에 못 죽을 것 같아.”
“겁이 난 거구나.”
“설사 살아난다고 해도 그건 수많은 생명을 살해한 악마가 되었다는 뜻이지.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그래서 다이아몬드를 포기하고 싶은 거야. 뒤늦게 철든 거지.”
유진의 말은 진심이었다.
“아, 우리 유진 씨가 완전히 딴사람이 되었네.”
지우는 유진의 변화가 내심 반가웠지만 지금은 왜 그런지 마냥 즐겁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이상한 변화였다.
정말 유진의 키스를 좋아했던 것일까.
“어쨌든 나를 구해줘서 정말 고마웠어.”
유진이 손을 내밀어 이별의 악수를 청하자 지우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자기, 정말 후회하지 않겠어?”
“응.”
단호하게 대답을 한 유진은 유난히 부드럽고 따뜻한 그녀의 손으로부터 자기 손을 살그머니 빼냈다. 그 순간 지우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럼 잘 가.”
기분이 상한 그녀는 저도 모르게 툭 내뱉었다. 지우의 까맣던 눈이 어느새 차츰 투명하게 변해 있었다. 한동안 검게 변하던 그의 눈동자가 다시 회수한 슈퍼 다이아몬드의 빛을 받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지우의 눈동자는 여전히 고혹적이었다.
“……!”
유진은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계속 보다가는 자신의 결심이 흔들릴 것 같아 얼른 뒤돌아섰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중간에 몇 번이나 뒤돌아서서 지우의 아름다운 얼굴을 한 번만 더 보자 하는 강한 충동을 느꼈지만,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아갔다.
5월 30일
유진은 현실 세계로 들어서는 팔달산 매표소에 다다랐다. 경계선에 선 그는 뒤돌아서서 파란 하늘을 등지고 있는 팔달산의 완만한 능선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뒤집어진 배의 바닥 같은 형상을 한 팔달산 속으로 흡혈박쥐들이 떼를 지어 돌아오고 있었다.
“슈퍼 다이아몬드가 제자리로 돌아가니 저놈들도 못 버티고 시내에서 모두 물러나는군.”
박쥐 떼를 유심히 쳐다보며 중얼거리던 유진은 매표소로 발길을 돌렸다. 마침내 사람들이 북적이는 시내로 진입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지우에 대해 도저히 끊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그의 애틋한 마음이 조금 엷어졌다. 하지만 그가 산속에서 겪은 여러 가지 기이한 사건들은 예상과는 달리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결코 신화(神話)가 아니었다.
“이런, 신기루가 아니었어.”
그래서 그런지 며칠 동안 산속에 겪었던 수많은 일들이 그의 기억 창고에 빼곡히 쌓이면서 유진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꽉 찬 것처럼 든든해졌다. 또한 근거 없는 자신감도 샘물처럼 솟아났다. 그는 야릇한 기분을 느끼며 서둘러 자기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기 방 안에 들어가서는 하루 종일 기분 좋은 단잠을 깊게 잤다. 다음 날, 오전까지 늘어지게 늦잠을 잔 유진은 후줄근한 녹색 운동복을 걸치고 약혼자 가희의 집으로 찾아갔다.
“……!”
마침 뒤늦은 아침을 먹고 있던 가희는 유진이 집안에 들어서자 반색하고 뛰어나왔다.
“다이아몬드는 찾았어?”
그녀는 유진이 안부를 물을 틈도 주지 않고 제일 먼저 다이아몬드의 행방부터 물었다. 하지만 유진은 그동안 가희의 안전이 매우 걱정이 되었는지 그녀의 행색을 재빠르게 훑어본다.
“그동안 별일 없었어?”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드는 흡혈박쥐들이 두렵기는 했지만, 깡으로 악으로 버텨왔어. 그런데 다이아몬드는 찾은 거야 못 찾은 거야?”
그녀의 관심은 온통 다이아몬드에 가 있었다.
“그, 그게 말이야.”
유진이 살짝 뜸을 들이자, 가희의 얼굴색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못 찾은 거야?”
“그래. 못 찾았어.”
“정말로 못 찾았다고?”
가희의 목소리가 금방 신경질적으로 바뀌었다.
“그래! 못 찾았어!”
기분이 상한 유진도 볼멘소리를 내질렀다.
“그럼, 우리 결혼은? 우리 집은? 오, 안돼!”
가희는 거의 미친 여자처럼 혼자 절규를 하더니 급기야는 울먹였다. 그리고 땅이 꺼지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은 했었지만, 가희가 너무나 절망하는 모습을 보자 유진은 조금 씁쓸했다.
“다이아몬드 대신 내가 열심히 일하면 돈 벌 수 있어. 가희야,”
“백수가 무슨 수로 돈을 벌어와?”
매우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유진은 꾹 참고 가희를 달랬다.
“가희야, 나 많이 달라졌어. 이제 다이아몬드가 없어도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어.”
“그깟 자신감만 있으면 돈이 저절로 굴러온대?”
“가희야, 사실은 말이야.”
가희의 반응에 유진이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동안 그가 겪었던 일들을 털어놓으려고 하자 가희는가 소리를 질렀다.
“그만, 됐어!”
그녀의 날카로운 고함에 줄곧 참고 있던 유진도 마침내 진짜로 화를 냈다.
“가희야, 이건 너무하는 것 아니야?”
유진이 정색을 하자 가희는 더욱 싸늘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너무하는 것은 당신이야! 이제 우리 관계도 그만 끊어! 나도 이제 인내심 바닥이야.”
“가희야,”
“그만 나가줘. 먹던 밥이나 마저 먹게.”
가희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밥상으로 돌아가 숟가락을 들더니 화가 난 듯 밥을 떠서 입안에 사납게 퍼넣었다.
“……!”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멍하게 바라보고 있던 유진은 말없이 뒤돌아섰다. 그를 여전히 대책 없는 백수라고 비난하는 그녀가 야속했다. 그런데 유진은 예전처럼 분노하지 않았다. 단지 가희가 가엾고 짠하다고 여길 뿐이었다.
야박한 가희를 대하는 자신을 보고 유진은 비로소 자기 마음에 이상한 변화가 생겼음을 뚜렷하게 느꼈다.
“분명 예전의 내가 아니야. 왜 그런 거지?”
유진이 생각해 보니 그러한 자신의 변화는 팔달산에 다녀온 뒤부터 생긴 것 같았다. 팔달산에서 많은 일을 겪었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가 몸속에 다이아몬드를 잉태하고 돌아온 것이었다.
“설마 그것이?”
그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무엇이 원인이 되었든 그 변화는 그리 기분 나쁜 것은 아니었다. 가희에게서 매몰차게 손절당하고도 담담한 것도 그 다이아몬드의 힘 때문이라면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어쨌든 유진은 가희와 헤어진 후 왠지 모르게 불끈불끈 솟는 자신감을 즐기며 자신의 삶을 차곡차곡 준비해 나갔다. 그는 팔달산에서 재발견한 자신의 검술 솜씨를 밑천 삼아 대학 선배가 운영하는 검술 도장에 사범으로 취업했다. 그는 그곳에서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후 은행에서 청년 대출을 받아 작은 검도 도장이라도 차릴 계획이었다.
그가 가희에게 자신의 계획을 한 번 더 설명하고 싶어서 그녀의 집으로 달려갔더니 놀랍게도 집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사이 가희는 빈털터리인 유진이 찾아와 달라붙을까 봐 어디론가 이사해 버린 것이다.
“야반도주라니……가희야, 이건 너무하지 않아?”
6월 2일
유진이 선배가 운영하는 도장에서 사범으로 일하게 된 지 사흘째 되는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도 그는 개구쟁이 초등부 학생들을 지도하느라고 녹초가 되어 퇴근했다. 그리고 거실 소파에 눕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얼마나 잤을까.
원탁 위에 놓여있는 휴대폰이 갑자기 요란하게 울렸다. 그 바람에 잠이 깬 그가 소파 맞은편의 벽시계를 흘끔 보니 어느새 밤 10시가 넘었다.
“대체 누가 이 시간에 전화질이야?”
유진은 짜증을 부리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휴대폰 액정에 뜬금없이 가희의 이름이 떠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에서 가희 대신 낯선 여자 목소리가 다급하게 흘러나왔다.
“밤늦게 죄송합니다만 김 가희라는 환자분 보호자이신가요?”
“보호자요? 거기 어디시죠?”
“여기 병원 응급실인데요, 빨리 와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