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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부초밥 Jul 23. 2023

엄마의 색

“엄마는 무슨 색이 제일 좋아?”

아마도 학교에서 ‘나를 나타내는 10가지 질문’에 답변하는 과제를 내주었거나, 아니면 같이 놀던 친구가 ‘너는 무슨 색을 좋아해?’라고 물어본 날이었을 것이다. 그전까지 나는 내가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음… 초록색?”

“그럼 나도 이제부터 초록색이 좋아!”

그러고 나서 나는 과제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칸에 ‘초록색’이라고 적었거나, 친구에게 ‘생각해 보니 난 초록색이 좋아. 왜냐하면 우리 엄마도 초록색이 좋다고 했거든.’하고 말했을 것이다.


이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기억 중 하나다. 몇 살 때였는지 자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 나이 때의 아이에게 특히, 여자아이에게 ‘엄마’라는 사람이 어떤 의미인지 보여주는 아주 단적인 예가 아닌가. 그 이후로도 나는 틈만 나면 ‘엄마는 초록색을 좋아한다.’는 그 사실에 굉장한 의미 부여를 했다. 어버이날 카드나, 크리스마스카드 등 엄마에게 쓰는 편지나 엄마를 위한 그림에는 가능한 한 초록색이 들어가도록 했다.

“어? 엄마가 좋아하는 초록색이네~”

“엄마는 초록색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초록색 해~ 난 주황색 할래.”


‘초록색이 왜 제일 좋아?’하고 되물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에 대한 엄마의 대답은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니,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초록을 ‘왜’ 좋아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색은 엄마가 좋아하는 색이었다.


어느 순간 엄마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초록색을 좋아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딸아이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약간의 당혹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육아에 지쳐 있느라 당신이 좋아하는 색이 무슨 색인지도 모르다가 딸의 다소 천진난만한 질문에 수줍게 부랴부랴 초록색을 가장 좋아하는 색으로 지정했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초록색을 좋아하는 마음보다, 내가 초록색을 좋아하는 엄마를 좋아하는 마음이, 엄마가 초록색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기쁨이 더 컸으리라 짐작한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나에게는 20대 초반이 정체성을 찾는 시기였다. 대입 준비를 하는 고등학생에게는 정체성을 고민할 여유 따위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나는 좋아하는 색을 바꿨다. 엄마가 좋아한다고 해서 좋아하는 색이 아니라 내가 정말 좋다고 느끼는 색이 무엇일까 고민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그게 초록색은 아니어야 했다.

그 시기 나는 그 나이대 아이들이 그러하듯 멋 부리기에 관심이 많았고 옷과 구두와 가방과 쇼핑을 좋아했다. 내가 좋아한 옷들은 특히 화려하지 않은 무채색의 옷이었고, 나는 어디에나 무난한 올블랙 스타일을 좋아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색은 블랙으로 정해졌다. 옷장을 열어보니 검정 옷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엄마의 기호와 상관없이 내가 좋아하는 색을 정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도 벗어났고, 사람이 평생 같은 색을 좋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도 생겼다.


5월 24일, Boston Common과 Public Garden 사이에는 푸름이 가득했다. 20대 이후로 항상 바쁘게 살아온 탓인지 나에게는 녹음 속에서 유유자적하던 기억은 많지 않다. 초록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 그날의 엄마는 지금의 나와 비슷한 경험을 기억하며 초록을 좋아한다고 했을까? 엄마도 나처럼 육아에 시달리다가 어느 날 휴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때마침 초록이 엄마 곁에 있었던 걸까? 초록색을 좋아한다는 엄마의 말이 깊은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초록을 좋아하는 엄마가 나였다가, 초록을 좋아하는 엄마를 따라 초록을 좋아하는 내가 부끄러워 검정을 좋아하기로 한 나였다가,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내가 되었다. 초록을 좋아한 그날의 엄마는 지금 어떤 색을 좋아할까? 초록을 좋아한 그날의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몇 살이 더 많을까? 몇 년 후에 나도 아들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게 될까? 그때의 내 기분은 어떨까?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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