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엄마 01
특별할 게 없는, 어른 손바닥 크기의 작은 수첩이었다. 새까만 표지에는 빨강, 노랑, 초록색의 각기 다른 크기의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고, 내지는 무심한 검은 줄이 직직 그어져 있는 평범한 수첩이었다. 평범하지 않은 것은, 그 수첩 맨 뒷장에 서툰 손글씨로 쓰인 할머니의 이름이었다.
“할머니가 왜 돌아가셨는지 알아?”
무슨 이유로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했던 것인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집으로 가는 마지막 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 오빠가 불현듯 말했다. 오빠는 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이 말해주지 않는 것을 스스로 파악하는 데에 능숙했다. 반면 나는 그런 쪽으로는 젬병이었다. 나는 그런 오빠로부터 또 무언가를 주워듣고 배워야 한다는 사실이 몸서리치게 자존심이 상했지만, 오빠가 다음 말을 할 때까지 오빠 눈을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가 무슨 병으로 돌아가셨는지 알아야지.”
할머니는 아파서 돌아가셨다. 그러나 나는 병명이 무엇인지 몰랐다.
“암?”
“직장암. 직장이 어딘지는 알지?”
그 정돈 나도 알아. 알량한 내 자존심이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게 목구멍에 다른 무언가가 서둘러 차오르는 바람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오빠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온몸을 꽉 틀어쥐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할머니를 괴롭힌 자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이다.
할머니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암 투병을 하셨다. 그보다 조금 더 긴 시간 동안 우리는 함께 살았다. 내 인생 최초의 기억이 만들어진 집, 그 아파트의 1층 현관에 들어서면 마주 보이는 부엌 옆 그 방이 할머니의 방이었다. 할머니는 늘 새벽같이 일어났다. 내가 “할머니는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요?”라고 물으면 “그냥 일찍 눈이 떠져. 늙으면 잠이 없어지는 거여.”하고 말했다.
할머니는 우리와 같이 살기도 하고 때로는 셋째 큰아버지네 집에서 지내기도 했다. 병든 노모를 누가 모실 것이냐에 대한 형제간의 논의 같은 것을 이해하기에 당시 나는 너무 어리고 철이 없었다. 아들이 다섯, 딸이 셋이던 할머니이지만, 대부분은 막내아들인 아버지의 집에서, 그러니까 우리 집에서 지내시게 되었다. 할머니는 병든 몸이었고, 아버지가 의사였기 때문에? 형제 중 유일하게 대학병원이 있는 큰 도시에 살았기 때문에? 아니면 ‘병든 노모를 누가 모실 것이냐’에 대한 논의에서 형들을 이길 수 없는 막내였기 때문에?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나는 할머니랑 함께 사는 것이 즐거웠다.
할머니의 방은 왠지 모르게 너무도 따뜻했다. 나는 가끔 할머니의 방에서 할머니와 함께 잤는데, 할머니의 방이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온기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토록 따스한 온기는 할머니의 방이 아니라 할머니 그 자체에서 나온 것일지도 몰랐다. 하교하고 돌아온 오후 시간이면 할머니와 거실 소파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베란다로 들어온 햇빛이 마치 커다란 할머니의 몸을 비추기 위해 할머니 가장자리를 맴도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커다란 태양처럼 크고 햇빛만큼 따스했다.
“할머니 나 단추 떨어졌어요.” 내가 울상을 하며 말하면 할머니는 거실장 깊숙한 곳에서 반짇고리를 꺼내며 말했다. “가세 가지고 와 봐.”
“할머니, 가위를 왜 가세라고 해요?” 나는 가위를 가지고 할머니 곁으로 찰싹 달라붙으며 물었다.
“가세니까 가세지 뭐.”
일제강점기며 6.25까지 직접 겪은 몸이었지만 할머니는 이야기보따리를 늘어놓은 적은 없었다. 다만 내가 일제강점기에 대해 물으면 “옛날에는 애들이 말을 안 듣고 그럼 일본 순사들이 잡아간다 혔어. 그러면 울든 아도 딱 그친께. 일본 순사들이 그만치 무서웠다.”하고 짤막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