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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부초밥 Aug 15. 2023

젊은 할머니의 주름

엄마의 엄마 02

할머니와 엄마, 나, 세 여자가 각자 다른 집에 살게 된 것은 내가 서울로 대학을 간 해부터였다.

내가 유치원에 갈 무렵 2층에 살던 식구 네 명이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때부터 할머니 집은 더 이상 우리 집이 아니게 되었다. 다만 내가 서울로 대학을 간 그즈음부터 할머니는 막내딸인 엄마와 이웃에 살게 되었다. 그래서 고향에 내려갈 때면 따뜻한 할머니 품에 폭 안겨서 할머니가 툭, 하고 꺼내 놓는 단어 하나를 가슴에 쥔 채 상경할 수 있었다.


무릎이 아파 수술을 한 이후부터였을까. 아니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일까. 언젠가부터 할머니는 “다 늙어서 무슨 소용이여.” “늙으면 죽어야혀.” 시리즈의 푸념을 하셨다. 사실이었다. 할머니는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할머니의 몸은 할머니의 생각만큼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어서, 정말 할머니가 나이 들어가고 있는 것이 보여서, 그게 슬퍼서 나는 할머니가 조금이라도 젊음을 느꼈으면 싶었다. 아직도 가끔은 소녀 같은 수줍은 웃음을 짓는 할머니에게, 가능하다면 젊음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여름이었다. 날이 너무 더워서 우리는 친정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빙수 그릇 하나를 놓고 둘러앉아 있었다. 카페의 시원한 공기가 우리의 살갗을 스치며 더위를 진정시킬 동안 차가운 빙수는 우리 안으로 들어와 우리 몸 안을 서늘하게 채웠다. 새콤하고도 달콤한 기운이 입 안에 남아 기분을 들뜨게 했다. '스냅챗'이라는 앱으로 아기 얼굴 만들기가 유행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나는 엄마와 할머니 사진에 아기 얼굴 필터를 씌워 보였다. 젊어진 얼굴을 보고 수줍게 웃을 할머니를 기대했건만, 아기가 된 당신의 얼굴을 본 할머니가 말했다.

“아가가 왜 주름이 있냐. 뵈기 싫게.”


수많은 사람들의 아기가 된 모습을 보면서 현대 기술의 발전에 대해 감탄했었는데, 그날 그 카페에서 나오는 그 순간 갑자기 그 기술에 결함이 있는 것만 같았다. 할머니 말이 맞았다. 볼은 아기처럼 볼록해졌고 눈은 땡그랗게 변해 얼핏 보면 제법 아기 같아 보였으나, 자세히 보니 할머니의 주름은 미처 다 가리지 못했던 것이다.

할머니가 젊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픈 만큼 할머니가 늙어간다는 사실도 슬펐다.


영주권 취득을 위해 변호사를 선임했다. 변호사는 영주권 신청 절차가 진행되는 중에는 미국이민국에 체류 의사를 분명히 보이기 위해 해외여행을 자제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한국에 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까진 아니지만 한국에 가는 것만이 할머니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무거워진다.

'늬 미국 갔다 돌아 오며는 나는 죽어서 읎어.'

할머니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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