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나를 상상한다.
물론 어린 시절에도 종종 더 어린 시절의 나를 상상하기도 했었다. 다만 그것은 상상이 아니라 기억의 조각 쪽에 조금 더 가깝다. 그 상상 속에서 갓난아기인 나는 외할머니의 등에 업힌 채 볕이 드는 창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다. 언젠가 읽었던 책 속에 나오는 갓난아기의 이미지를 종합하여 만들어진 모습이거나, 무의식 중에 내가 기억하는, 혹은 외할머니로부터, 엄마로부터 전해 들은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그대로 이미지화한 것이다.
아이를 낳아본 지금은 더 구체적인 상상을 한다. 상상 속의 갓난아기인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며, ‘누군가’이다. 과거의 상상이 ‘나’의 시점이라면, 현재의 상상은 ‘제3자’의 시점이다. 과거의 상상 속에서 나의 혼은 갓난아기의 몸 안에서 볕이 드는 창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면, 지금은 어느 집 높은 천장 백열등의 전구 안에서 갓난아기인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 갓난아기는 방금 단잠에서 깨어났다. 기저귀에 응가를 함박 싸놓고 축축함과 배고픔이 섞인 울음을 울고 있다. 아기의 외할머니가 다가와 “에고. 아가. 똥 쌌네.” 하면서 한 손으로 두 다리를 움켜쥐고 들어 올린다. 그다음 뽀얀 엉덩이에 묻은 배설물을 손수건으로 훔쳐내고 목뒤를 받쳐 아기를 들어 올린 뒤 조심스레 거실 옆편에 자리한 화장실로 데려간다. 할머니 품에 안긴 아기는 일순간 조용해진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머니는 수도꼭지를 비틀어 큰 양동이에 물을 받아낸다. 물 온도가 너무 뜨겁지는 않은지, 양동이가 너무 차가워 아기가 놀라지는 않을지 다른 한 손으로 양동이의 물을 휘휘 저어 본다. “적당허네.” 혼자 중얼거린 뒤 아기를 살포시 양동이에 기대어 내려놓는다. 물속에서 부드럽게 아기의 엉덩이를 닦아내고 두어 번 더 물을 받아 헹궈낸다. 마침내 물놀이가 끝난 아기는 섧게 운다. “어야, 어야. 맘마 줄게.” 아기를 어르면서 화장실 바로 옆에 딸린 주방으로 간다. 싱크대 옆에 놓여있는 젖병 서너 개 중 한 개를 집어 든다. “아까 따땃하게 끓여 놓은 물이 식었을라나.” 새끼손가락을 슬며시 집어놓고 주전자의 물 온도를 확인한다. 젖병에 물을 넣고 분유 몇 스푼을 탁탁 털어 넣는다. 뚜껑을 닫고 조심스레 좌우로 흔든다. “좀만 기둘려. 금방 줄게이.” 손녀의 보채는 울음에 맞춰 마치 노래하듯 대답한다. 젖병이 적당한 각도로 채 기울기도 전에 아기는 제가 가진 모든 힘을 써서 고개를, 입술을 삐쭉 들어 올린다. “야 봐라. 야 봐. 글케 배고팠냐.” 살겠다고 젖을 찾아 먹으려는 손녀를 대견하게 바라보며 껄껄 웃는다.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키워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