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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부초밥 Jul 23. 2023

운과 운명 사이

8월이 다가오고 있다. 어쩌면 다가오는 것은 그냥 8월이 아니라 음력 8월, 즉, 9월의 어느 날일지도 모른다.

수화기 너머로 엄마는 말한다.

“이제 파트타임이라도 알아봐야지. 지난번에 넣었다는 건 어떻게 되었어?”

“안 됐어.”


정말로 씁쓸한 건지 아니면 오히려 희망찬 것인지 알 수 없는 내 마음을 잘 여민 채 나는 목소리에 씁쓸한 기운을 최대로 담아서 말했다. 나는 엄마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묻고, 답하고, 묻고, 답하다 보면 어느샌가 그가 말한 것이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나는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고 싶었다. 그저 시간을 속절없이 흘려보내면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마음껏 하다가, 그러다가 어느 순간 운명처럼 시작된 것이 나의 두 번째 직업이 된다면 그대로 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게 무엇이 되었든 다시는 그것이 내 인생을 잡아먹을 기회를 주지 않고, 큰 의미를 주지 않고 또 그냥저냥 적당히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살다가, 언젠가 나에게 세 번째 변화의 기회가 온다면 또 그 기회를 덥석 잡을 생각이었다.


점쟁이가 말했더랬다. 8월쯤이 되면 남편도 직장에서 제법 자리를 잡게 되고, 나도 새로운 일자리가 생긴다고 했더랬다. 그가 말하는 8월이 내가 생각하는 그 8월인지, 아니면 음력 8월인지 나는 모른다. 그 얘기를 들은 지도 꽤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뒤로 한참 동안은 8월이 마치 내 구직 기간의 결승점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해 왔다. 6월에는 두 군데에 이력서를 넣었다. 솔직히 말해 정말 구직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아닌 쪽에 더 가까웠다. 영어를 잘하지도 못하고 조직 생활에 환멸감을 느끼면서도, manager라는 직책에 걸맞은 업무를 수행할 자신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종의 상향 지원을 했다. 답변이 오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심사숙고한 결과, 본 채용에서 당사는 귀하를 채용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 ’

‘귀하의 경력과 이력을 종합하여 검토한 결과, 당사가 찾는 포지션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


일순간 타인이 판단한 내 가치의 하찮음에 씁쓸함을 느끼고, 곧바로 메일을 휴지통에 넣었다. 또다시 회피한 것이다. 회피는 인생에서 좌절을 만날 때 내가 선택하는 가장 쉽고 편안한 방법이다. 사실 두 메일 모두 끝까지 읽지도 않았다. 곧바로 휴지통에 던져진 메일이었지만, 그 메일들 속에 있던 위 두 문구는 단 한 번 내 뇌를 스쳐 지나갔음에도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처받지 않았다. 나의 씁쓸함은 단 몇 초 안에 완전히 끝이 났다. 진지하게 구직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멋진 직업을 갖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소박한 직업을 갖기로 결심했다. 소박해 보이는 직업을 멋지게 갖고 싶다. 그러니까, 남들이 보기에 멋진 직업을 갖고 싶은 욕심은 더 이상 없다. 다만 나에게 딱 맞는 직업을 가지고 싶다. 이제는 엄마의 명품 옷을 어설프게 걸쳐 입은 아이보다는, 자기 몸에 딱 맞는 옷을 소박하게 갖춰 입은 게 훨씬 멋있어 보인다는 말이다. 딱 맞는 어깨선, 딱 맞아떨어지는 핏. 나는 그런 옷을 찾기 위해 치수를 재는 중이었다. 나는 나를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긴 시간 동안 나는 나를 알아가는 것에 대해 게을렀다.

“이제 좀 찾아봐. 힘들지 않게 파트타임으로.”

엄마는 한 번 더 강조하듯 말했다. 최근에 점쟁이로부터 또 무슨 말을 들은 걸까? 되물으려다가 입을 꾹 닫았다. 한 번쯤 점쟁이의 말과 무관하게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꽃병은 신경 쓰지 마”라는 대사처럼, 점쟁이의 점괘는 항상 자기 충족적 예언의 결과를 낳았다. 그러니까 점쟁이가 8월에 직장을 찾게 될 거라고 말한다면, 과거의 나는 그 말을 듣고 직장을 구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결과는 항상 점쟁이의 말처럼 이루어졌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노력했기에 얻은 결과인지, 아니면 내 운명이 그러한 것인지 결코 알 수 없었다. 만약 그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그저 원하는 대로 살아간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엄마는 매년 운세를 점치기 위해 점집에 찾아갔다. 딱히 내가 그걸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나름대로 용했다. 이번 연도에는 나에게 이사운이 있다던가, 승진운이 있다던가 하는 것을 죄다 맞췄다.

나는 딱 한 번 그를 직접 본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결혼하기 전이었고,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친구를 사귀고 있었다. 내 결혼운에 대해서 그는 “아, 지금 만나고 있는 그 남자는 아니야.”라고 말했다. 그 남자가 아니라는 것에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다만 언제 새로운 남자를 또 만나서 사귀고 알아가고 결혼까지 한단 말인가. 그래서 되물었다. “그럼 언제 만나는데요?”

“이미 만났네, 뭘. 얼마 안 가서 만나.”

이미 만났는데 또 얼마 안 가서 만난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이람?


남편과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서로 알고 있던 사이었다. 도서관에서 만나면 서먹하게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다. 이미 만났던 사이. 그 점집에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그 당시 남자친구와 이별하고, 현재의 남편과 사귀게 되었다. 얼마 안 가서 만날 사이. 그 밖에도 그는 내가 어렸을 적 성범죄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는 사실도 꿰뚫어 보았다. 다만 그 탓을 내 속옷으로 돌린 것은 그다지 믿음직스러운 점괘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핑크색 속옷 입지 말고.”

확실히 나는 성범죄의 대상이 된 적은 있었지만, 속옷 때문은 아니었다.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나에게 다양한 색의 속옷이 있었고, 나는 매일 다른 색의 속옷을 입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행해졌다. 즉, 내가 무슨 색의 속옷을 입었는지는 그 결과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상당히 용한 점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 마음속에 8월이라는 데드라인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요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나를 괴롭게 한 무수한 생각들을 모조리 끄집어내어 활자로 변환하기 전까지 나는 나에 대해 탐구하기를 멈추지 않을 계획이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책을 읽다 말고 나는 Craigslist에 접속해 보았다. 집 근처에 적당한 파트타임 공고가 있는지 대충 훑어보았다. 당분간 직업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한 한 마디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다. 실제로 나는 구직을 멈추고 전업주부의 삶을 이어갈 생각이었다. 그것이 내가 불합격 메일을 받고도 조금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이다. 대신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기로 다짐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나는 다시 8월의 점괘에 대해서 생각했다. 만약 그런 운이 나에게 있음에도, 내가 노력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래도 예기치 못한 기회라는 것이 찾아올까? 나는 슬며시 Craigslist를 닫았다. 만약 그렇다면, 그 기회를 수고스럽게 뿌리치진 않으리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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