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리우: 일요 히피시장, 식물원, 보사노바공연-2015/04/26
현금 인출 작전
목걸이 강도 사건 이후로 움츠러든 우리 트리오는 현금을 인출하러 은행에 가는 일이 너무 두려웠다. 누군가 어수룩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해코지를 할 것만 같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돈 없이 살 수도 없으니 은행은 가야겠고, 해서 계획을 짰다.
<Step 1> 일단 숙소에서 최대한 가깝고 오가는 사람이 많은 번화가이며 현금인출기가 은행 건물 내부에 있는 은행을 찾을 것.
<Step 2> 내가 돈을 찾는 동안 형주가 나를 등지고 주변 상활을 확인할 것.
<Step 3> 돈을 인출하고 바로 숙소로 돌아와서 안전하게 자물쇠가 달린 가방에 넣어두고 쓸 돈만 손가방에 들고 다닐 것.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작전을 세우고 각자의 역할을 숙지한 후 마음을 단단히 먹고 길을 나섰다. 숙소 근처의 번화한 거리 위주로 두 바퀴를 돌아보고 나서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여겨지는 은행에 들어가 형주의 경호를 받으며 현금을 인출했다. 인출한 돈이 든 가방을 품에 안고 그 위에 외투를 입어 가방을 가리고는 서둘러 숙소로 돌아와 문을 잠그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 이놈의 강도 트라우마에서 하루속히 벗어나야 할 텐데...
일요일 아침의 히피 시장
하늘이 흐린가 싶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날씨에는 해변에 갈 수도 없어서 일요일 아침에만 열린다는 히피 시장에 갔다. 전통악기부터 공예품, 액세서리, 생활용품, 가방, 옷, 주전부리, 그림 등 온갖 종류의 물건들이 가판대에서 판매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워낙 많아 우산을 들고 다니기 불편해서 그런지 아니면 더운 날씨에 내리는 고마운 비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돌아다녔다.
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서 형주는 히피풍의 반지에 끌려 뱀 문양의 반지를 샀다. 제나도 오빠처럼 반지를 사고 싶은데 손가락이 너무 작아서 맞는 반지가 없어 속상해하니까 인심 좋은 할아버지가 그런 제나를 위해 즉석에서 예쁜 반지를 만들어주셨다. 제나가 좋아서 팔짝팔짝 뛰자 예뻐서 주는 선물이라며 환하게 웃으셨다.
자기 것만 사기가 미안했는지 잃어버린 목걸이를 대신할 목걸이를 하나 사자며 형주가 나를 잡아끌어고 가서는 리우의 예수상 모양을 한 펜던트가 달린 은 목걸이를 하나 골라주었다. 잃어버린 목걸이는 비싼 건 아니었지만 남편이 연애시절에 처음으로 선물해줘서 20년 넘게 몸에 지니고 다녔던 터라 이젠 몸의 일부처럼 돼버린 그런 물건이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물건은 아니었지만 익숙하던 것이 갑자기 없어지니 허전하던 참이었는데 이제 그 빈자리에 리우의 추억이 담긴 목걸이가 걸렸다.
목걸이를 파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부는 모기에 물린 자국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부가 온통 빨갛게 부어오른 제나를 유심히 보시더니, 약국에 가서 사다 바르면 상처가 많이 가라앉을 거라며 작은 메모지에 약 이름을 적어 주셨다. 반지 할아버지와 목걸이 노부부의 따듯한 미소를 보고 나니 리우에 도둑과 강도만 사는 것도 아닌데 내가 너무 겁을 먹고 위축되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 부터라도 나쁜 일은 빨리 잊고 맛있는 거 많이 먹고 힘내서 행복한 기억을 더 많이 만들어야겠다. 어제의 일은 여행하면서 충분히 생길 수 있는 일이었고 어쩌면 앞으로도 생길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소라게처럼 움츠러든다면 여행을 마치고 나서 두려운 마음만 기억하게 될 테니, 이제부터라도 다시 씩씩한 나로 돌아가야만 한다.
힘을 내기 위해 히피 시장 근처에서 맛있는 피자를 사 먹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숙소 옆 식당 입구에 주렁주렁 매달아 파는 코코넛을 한통 사다가 후식으로 먹었다. 코코넛을 고르면 즉석에서 큰 칼로 빨대가 들어갈 만큼 윗부분을 쳐내서 빨대를 꽂아주는데 그 맛이 부드럽게 달콤한 데다 시원해서 더울 때마다 즐겨마시곤 했다. 코코넛 통 하나에 빨대 세 개를 꽂아두고 셋이 서로 번갈아가며 머리를 들이밀고 먹자니 묘한 경쟁심이 생겨서 서로 더 먹겠다고 머리를 들이밀다가 웃음보가 터졌다. 배부르게 먹고 시원하게 한바탕 웃고 나니 이제야 새 힘이 샘솟는 듯하다.
식물원(Jardim Botanico)
아직 오후 반나절이 남았다.
비 온 후라 더운 공기가 좀 식어서 바깥에서 걷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근처의 식물원으로 향했다. 이곳은 1800년대 왕실 정원으로 만들어져 8천여 종의 나무와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고 한다.
입구에 들어서니 30미터는 족히 넘는 제왕 야자나무가 산책로의 양옆으로 일직선을 이루고 있었다. 땅에서 하늘까지 자를 대고 그은 듯이 똑바로 자란 제왕 야자나무 사이를 걷다 보면 거대한 호위무사들의 호위를 받는 왕이라도 된 기분이다.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공들여 가꿔진 왕실의 정원인 이곳에는 온갖 종류의 새들과 원숭이들이 제집인양 평화롭게 노래 부르고 장난을 치며 놀고 있다. 식물원의 나무가 조금이라도 비껴 나 하늘이 보일 때면 언덕 위에 리우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새하얀 예수상이 햇빛 아래 밝게 빛났다.
내일은 저 언덕에 오를 것이다.
한밤의 보사노바 공연
식물원을 돌아보고 나니 벌써 어둑한 저녁이다. 숙소가 있는 동네로 돌아와 숙소 근처의 음반가게(Toca do Vincious)로 향했다. 리우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인 보사노바로 유명한 이 음반가게에서 CD를 하나 살까 하는 생각에 들렀는데, 음반가게 앞에서 무슨 행사를 하는지 카메라와 조명기기가 설치되어 촬영을 하고 있었고 사람들일 도로까지 점령한 채 모여들어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유명한 가수인 듯한 노부인 한 분의 핸드 프린팅 행사를 음반 가게 주인인 듯한 노신사가 진행하고 있었다. 그 여가수의 팬들이 꽃다발을 그녀에게 꽃다발을 안겨주고는 악수를 하기도 하고 플래시를 터뜨리며 사진을 찍는 것으로 봐서 상당히 유명한 가수처럼 보였으나, 아쉽게도 그녀는 노래를 부르지 않고 행사만 마치고 퇴장했다.
곧이어 등장한 중년의 밴드의 공연이 시작되자 모여 있던 관중들은 함께 열심히 따라 부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모르는 노래라서 따라 부르지는 못했지만 춤이라면 빠지지 않는 제나가 그 틈에서 내 손을 잡고 춤을 추자 옆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노래 부르고 춤추던 중년 여성이 제나의 손을 붙잡고 몸을 흔들며 함께 춤을 추었다.
관록이 묻어나는 밴드의 연주와 노래는 밤이 깊어가도록 계속되었고 모여든 사람들의 열기도 식을 줄 몰랐다. 아직 공연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 식물원 나들이로 피곤해진 제나는 졸리다며 내 등으로 기어 올라왔다. 제나를 등에 업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내 발걸음은 어느새 보사노바의 리듬에 맞춰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