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아, 멈춰! 그거 술 이래!"

리우 데 자네이루 , 이빠네마 해변 - 2015/04/25(토)

by 민경화

모닝커피 향이 아닌 시멘트 가루 냄새를 맡으며 맞이한 아침.

험한 일을 당한 뒤라 선뜻 밖으로 나서기에는 용기가 필요할 만큼 의기소침해진 우리는 2층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바깥의 풍경을 먼저 살폈다. 아침 햇살 속에 해수욕 복장을 한 청춘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목걸이를 빼앗긴 것만도 억울한데, 리우라는 세계적인 해변도시에서 우리만 상처받은 영혼 모드에 빠져있다고 생각하니 더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털고 일어나 간단히 아침을 먹고 우리도 해수욕 복장으로 갈아입고 해변으로 향했다.

이빠네마 해변이 있는 거리에는 은퇴 후 요양하러 온 듯 부유해 보이는 백인 노인들이 많이 눈에 띄었고 해변 근처의 주택들도 모두 고급스러웠다. 어제 헤알 버스를 타고 오면서 센뜨로의 어두운 골목에서 봤던 어두운 피부색의 노동자들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다. 피부색을 기준으로 극명하게 나뉜 경제 계급을 대하니, 내 오랜 습관인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세상을 강자와 약자, 지배층과 피지배층, 부자와 빈자로 구분해서 대결구도로 몰고 가는 습관. 내가 약자에 속하는 상황이면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고 강자에 속하는 상황이면 죄의식에 마음이 편치 못한, 그래서 어떤 상황도 마음 놓고 행복할 수 없는 이상한 습관이 바로 그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평등하거나 공평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설혹 그런 세상이 가능하다고 해도 지금의 세상보다 더 나을지 그것조차도 알 수 없는 일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자와 약자로 구분된 세상에 자꾸만 마음이 쓰이는 것은 힘과 부에 따라 기본적으로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권리마저 한쪽으로 치우치는 현실의 불합리함이 개선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간극이 점점 더 크게 벌어지고 있는 정의롭지 못한 현실 때문이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불평등과 차별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뿐일 것이다. 그런 현실에 눈 감지 않고 외면하지 않는 것. 지금의 나는 고작 그런 정도밖에 할 수 없는 소심하고 힘없는 사람일 뿐이지만 언젠가 내게도 작게나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손잡고 세상을 좀 더 정의롭게 변화시킬 기회가 주어졌을 때 기꺼이 동참하는 정도의 용기만 잃지 않는다면 세상은 분명히 더 좋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지나친 비약에 자기합리화라고? 맞다. 내가 아직 어리고(?) 지나치게 감상적인 데다 지식이 부족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서 독서와 경험치가 쌓인다면 더 현명해지고 용감해지겠지.’하고 기대하며 사는 중이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함께 나의 성장을 응원해주기 바란다.)

이야기를 다시 리우의 거리로 가져와야겠다.

고급 주택가와 가볍고 경쾌한 보사노바 음악이 흐르는 식당가를 수영복 차림으로 거니는 사람들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가니 눈앞에 탁 트인 바다가 나타났다.

대서양이다.

2361144D560A119715478D 처음 마주한 대서양

어차피 바닷물은 흘러 서로 섞이며 지구를 휘감아 도는 물질이고, 사람이 거기에 이름을 붙여서 대서양은 니꺼 태평양은 내꺼라고 의미 없이 구분 지었을 뿐인데, 그 걸 다 아는 데도 평생 태평양만 보고 살다가 생전 처음 대서양을 보는 내 심장은 평소보다 더 큰 소리로 쿵쾅댔다.

가족단위로 휴가 온 사람들,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썬 텐을 하며 책을 읽는 아름다운 여인들, 친구들과 몰려와 공을 주고받으며 젊음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청년들로 해변은 가득했다. 해변의 오른편으로는 빵 지 아수까르 산이 보이고, 해변에 면한 도로 건너편에는 고층건물들이 병풍처럼 들어서 있다. 대서양을 배경으로 한 하늘과 산, 심지어 고층 건물들까지 어느 각도로 카메라를 들이대도 그림엽서 속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 됐다. 형주는 대서양의 파도와 노느라 정신없었고, 제나와 나는 해변에 자리 잡고 앉아서 모래 놀이를 했다. 모래가 유난히 희고 곱다. 곱게 빻은 호밀 가루라고 해도 믿겠다.


2551264D560A11982312E4 뒤로 빵 지 아수까르 산이 보인다.
2167774D560A119A0E28D1 호밀가루 처럼 곱고 부드러운 모래
20150425_140405.jpg 대서양에 몸을 담근 소년

간식거리와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이 부지런히 사람들 사이를 오갔다. 넓고 화려한 해변용 숄을 파는 사람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숄을 팔러 다니는 모습, 맨 몸으로도 걷기 불편한 모래사장 위에서 음료를 쟁반에 받쳐 들고 자유자재로 돌아다니며 배달하는 웨이터들의 모습은 바닷가의 풍경을 더 활기차게 만들며 그 자체로 해변 위의 또 다른 풍경이 되었다.

한참을 놀다가 목이 마른 형주가 우리도 음료를 시켜 먹자고 하기에 지나가는 웨이터를 불러 세워 어떤 음료가 있냐고 물었더니 그는 영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손에 받쳐 들고 있는 주황색 음료를 가리키며 그걸로 달라고 했다. 약 30분 후 웨이터는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와서는 차가운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그 주황색 음료를 내게 건넸고 나는 그것을 아이들에게 먼저 양보했다. 달고 시원한 음료를 마실 생각에 들뜬 제나가 그 음료를 받아 들고 마시려고 입에 대자 갑자기 웨이터가 얼굴이 사색이 되며 손을 내저었다. 왜 그러나 의아해하며 형주가 받아 들고 마시려고 하자, 우리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중년 여성이 다가와서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음료가 아니라 술이에요.”

말을 못 알아듣는 엄마 때문에 백주대낮에 너희들에게 술을 마시게 할 뻔했구나. 미안하다, 얘들아...

형주가 그 웨이터를 따라가서 과일을 골라서 주스를 만들어오겠다고 해서 보냈는데, 30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던가. 목걸이 강도를 당했던 일이 떠올라 혹시 나쁜 일이 생긴 게 아닌가 걱정하며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데, 거의 한 시간 만에 웨이터와 함께 형주가 돌아왔다. 특별히 큰 컵에 가득 담아왔다며 마라쿠쟈 주스를 가져와서 제 동생에게 건네주는 녀석의 모습이 기특하고 의젓하다.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파파야 주스의 맛도 기막히고.

2452734D560A119D21C3F0 대서양에서 모래만 만지작 거린 소녀야, 주스 맛있니?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기 시작해서 숙소로 돌아와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을 먹었다.

석양이 물드는 바다가 보고 싶어서 제나를 유모차에 태우고 다시 이빠네마 해변으로 나섰다. 해수욕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빠져나간 어둑한 해변과 그 해변을 따라 난 왕복 6차선의 시원한 도로, 주말을 맞아 보행자 도로가 된 도로 위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조깅을 하거나 여유롭게 거니는 사람들, 도로와 인도 사이에 심어진 야자수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연보라 빛 하늘, 높이 선을 그리며 날아다니는 까마귀들... 그리고 공기처럼 가볍게 귀를 간지럽히는 그 노래, the girl from Ipanema...

리우에서의 두 번째 밤이다.

2462B94D560A119E1449AD 해 질 녁 리우 해변의 거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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