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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화 Dec 29. 2017

중세로의 시간여행

쿠바, 비냘레스에서 뜨리니다드로 이동 - 2015/08/14(금) 

뜨리니다드로 가기 위해 새벽에 배낭을 짊어지고 아이들 손을 잡고 방을 나서니 사람 좋은 주인집 할아버지가 밭으로 나가는 일을 미루고 우리를 배웅하기 위해 기다리고 계셨다. 평소에는 그저 웃으실 뿐 별로 말씀이 없으셨는데, 오늘은 웃는 얼굴로 문을 열어주시며 단 한 마디를 건네셨다. 

“살룻(Salud)!"

헤어질 때 ‘안녕히’라는 뜻으로 쓰거나 건배할 때 ‘건강을 위하여’ 정도의 뜻을 가진 단어인데, 그 새벽에 우리를 위해 문을 열고 배웅하려고 기다리셨던 할아버지에게서 들었던 이 따듯한 말은 마치 ‘당신과 아이들의 여행에 건강과 축복을 빕니다.’라는 진심 어린 작별인사로 들렸다. 헤어질 때 대부분 “아디오스(Adios)"라고 하기에 우리도 그동안 그렇게 가볍게 인사해왔었는데, 숫기 없는 순박한 할아버지가 건넨 "살룻"라는 인사는 왠지 시적이면서 감동스럽게 들리기까지 했다. 할아버지의 진심이 담긴 그 한 마디에 열악한 숙소와 불친절했던 주인 할머니의 태도, 일부 배타적인 시골 동네 사람들 때문에 상했던 마음이 단번에 씻겨 내리는 듯했으니, 말과 태도가 지닌 힘이란 실로 크다. 우리도 감사의 마음을 담아 할아버지께 작별인사를 하고 숙소를 나섰다. 부디 건강하시길.

아침 7시 15분에 출발한 버스는 오후 네 시에 뜨리니다드에 도착했다. 버스는 아침식사와 점심 식사를 위해 중간에 휴게소에 들렀는데, 휴게소의 시설은 최악이었다. 벌판에서 각자 볼일을 해결하라고 했던 볼리비아 국경의 방식이 그리울 지경이었다. 그런 화장실에 들렀다가 식사를 하자니 비위가 상해서 뭘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으나 여행을 계속하려면 억지로라도 먹어야 했으니 아이들의 등을 두드려주며 간신히 끼니를 때웠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작은 도시를 지날 때면 도로에 말이 끄는 마차가 다니기도 하고, 버스 대용으로 사용되는 군용 트럭이 짐칸에 사람들을 잔뜩 태우고 달리기도 하고, 낡은 택시와 자전거 택시, 오토바이 택시 등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종류의 탈 것들이 등장하곤 했다. 대부분의 도로는 한산했고 덕분에 교통체증이 전혀 없다는 점은 쿠바가 가진 장점 중 하나였다.


우리가 도착한 시각, 뜨리니다드에는 시원하게 소나기가 내렸다. 자전거 택시를 타고 빗속을 달려 점찍어뒀던 숙소(Hostal El Chef)에 도착하니 우리가 머물 수 있는 방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오늘 임시로 머물 민박집을 소개받아 그곳에 짐을 풀었는데, 대저택의 2층에 위치한 방은 고풍스럽기로 따지면 라틴 아메리카에서 머물렀던 숙소들 중 최고였다. 스페인 풍의 건축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 집은 흰색 벽에 천장이 무척 높았고, 2층 전체를 사용하는데 전면이 모두 바로크 문양의 하얀 쇠창살을 단 묵직한 나무문이었다. 그 문을 열면 바로 앞에 기다란 발코니가 있어서 아래로 집의 정원을 내려다볼 수 있었고 침대 머리 쪽으로 나 있는 높은 창을 열면 도시의 실루엣이 한 폭의 그림처럼 걸려 있었다. 

짐을 풀고 내일 여행할 잉헤니오스 계곡행 증기기관 열차와 다음 행선지인 산따 끌라라행 버스를 예약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동글동글한 돌이 박힌 거리는 빗물에 씻겨 반들반들하게 빛났고 파스텔 톤의 낡은 건물들은 유럽식의 낭만적인 창살과 발코니로 멋을 냈다. 도시 전체가 소설 속이나 동화책 속에 등장하는 과거의 유럽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여행 온 듯한 기분이 든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거리에서 우연히 발견한 제과점에서 이런저런 빵과 과자를 사고 마트에서는 생필품과 간식거리도 샀다. 물자가 부족해서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없어 불편했던 아바나에 비해 이곳 뜨리니다드는 필요한 것을 구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니 이제 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숙소의 식사는 1인당 8 CUC으로 다소 비쌌지만 유럽풍의 고풍스러운 도자기에 담긴 신선한 재료로 요리된 음식들은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기에 충분했다. 쿠바는 화학비료를 쓰지 않기 때문에 모든 식재료가 유기농인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모든 음식이 담백하고 자극적이지 않았다. 한국에 수입되는 아보카도와 달리 쿠바의 아보카도는 우리네 애호박처럼 표면이 매끄럽고 연한 연두색이었는데, 집집마다 한 그루 씩 심겨 있는 아보카도 나무에서 식사 때마다 따다가 바로 만들어 먹는 아보카도 요리는 평소 느끼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촌스러운 내 입맛에도 무척 맛있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와 긴장을 풀고 침대에 누웠다. 열린 발코니로 내다보이는 하늘에 별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저녁 공기가 깨끗하고 시원하다. 우리네 가을 저녁처럼.   

   


까사 1층 주인집의 고풍스러운 거실과 다이닝 룸
까사에서의 저녁 식사
침대 머리맡으로 나있는 하얀 나무 창문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저녁 실루엣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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