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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화 Dec 29. 2017

달콤함을 위한 잔혹함

쿠바, 뜨리니다드: 잉헤니오스 계곡, 살사 공연 - 15/08/15(토)

습관처럼 새벽 일찍 잠에서 깼다. 낭만적인 창살 밖으로  어두운 하늘에 검은 나무 실루엣이 보였다. 아직 행인이나 자동차의 소음이 섞이지 않은 고요한 시간인데 돌이 박힌 거리를 달려가는 말발굽 소리와 마차의 나무바퀴 소리가 빈 거리를 경쾌하게 채우며 지나간다. 이른 아침 일터로 가는 농부의 마차였겠지만, 괜히 그 안에 사건 현장으로 가는 셜록 홈즈라도 타고 있을 것만 같은 엉뚱한 착각이 스쳐서 혼자 웃었다.  

어제 사온 과일과 빵으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오후에 Hostal El Chef로 숙소를 옮기기 위해 짐을 챙겨 맡겨두고 길을 나섰다. 잉헤니오스 계곡으로 가는 증기기관차를 타러 가는 좁은 길에서는 자동차보다 말이 끄는 수레를 더 자주 만났다. 다가닥 다가닥 경쾌한 말발굽 소리와 덜컹 거리는 수레가 곁을 지나갈 때마다 우리는 발걸음을 그들을 멈추고 바라보곤 했다. 


2층 숙소에서 내려다 보이는 아랫층 정원
침대 바로 앞의 나무문을 열면 발코니 창살과 티테이블이 보인다.
아직 꿈 속인 제나
증기 기관차를 타러 가는 길. 일터로 나가는 마차의 행렬이 정겹다.
마차를 주의하라는 도로 표지판
이웃에게 안부를 물으며 일터로 향하는 농부 아저씨
낡은 버스 옆, 도로 한복판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이야기 꽃을 피우는 사람들
역에서 증기 기관차가 출발하는 역
기차역 앞 도로 풍경. 트럭이 개조되어 여객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침 햇살 속 마차를 타고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 '톰 소여의 모험'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장례 운구 행렬. 돌아가신 분을 애도하는 사람들이 장례차량을 따라 묘지까지 함께 걷고 있다.
개조된 트럭이 스쿨버스로 사용되고 있다.


드디어 증기기관차가 역에 도착했다. 모형으로 보긴 했지만 이렇게 실제로 시커먼 연기를 뿜어대며 철길 위를 달리는 증기기관차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기관차의 기적 소리, 기차 화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철길을 달리며 철로와 기차 바퀴가 만들어내는 마찰음, 차체의 덜컹이는 소리... 이 모든 소리가 극대화되어 한동안 귀를 마비시키는 듯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객실은 앞뒤가 트여 있었고 유리창이 달려있지 않아서 기차가 달리면 바람에 모자가 날아가지 않도록 손으로 붙잡아야만 했다. 기차가 내는 요란한 소음과 달리 기차 밖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한가롭게 풀 뜯는 소와 말, 염소들, 끝없이 펼쳐진 푸른 평야, 목초지와 경작지, 기찻길 옆 소박한 집들... 온통 푸른 풍경 속을 천천히 달리며 눈이 호강하는 사이에 기차는 목적지인 마나까 이스나가 역에 도착했다. 기차는 이곳에서 1시간을 머물다가 출발한다.


역으로 들어서는 증기 기관차
기차에 창문이 없이 사방이 뚫려 있어서 불어오는 바람도, 바깥의 풍경도 시원하다.
철교 아래
쿠바 음악을 연주하는 아저씨


기차에서 만난 착하고 예쁜 눈을 가진 쿠바 소녀
기찻길 옆 농장


이곳은 1790년대 쿠바의 대부호 중 하나였던 이스나가 가문이 살던 곳으로 그들이 살던 대저택과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며 1830년대에 새운 44미터 높이의 노예 감시탑으로 유명하다. 노예 감시탑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당시 수탕 수수 농장의 규모가 어떠했을지, 그곳으로 끌려왔던 흑인들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했을지 충분히 짐작된다. 지금은 그 입구부터 관광객을 대상으로 기념품을 파는 가판대가 늘어서 있고, 감시탑은 잉헤니오스 계곡의 경치를 감상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고, 이스나가 가문의 대저택은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다. 

감시탑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은 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고 가팔라서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들과 아래에서 올라가는 사람들이 번갈아 가며 기다렸다가 올라가고 내려와야 했다. 그렇게 천천히 올라 감시탑의 정상에 도착하니 아름다운 잉헤니오스 계곡의 풍광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면서 막힌데 없이 드넓게 펼쳐진 평야의 그 끝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풍광을 그저 속없이 감탄만 하기에는 달콤함을 위해 이 땅에서 벌였던 잔혹한 역사가 너무 아프다. 

노예 탑으로 들어가는 초입. 흰 천에 수를 놓은 기념품들이 널려 바람에 펄럭이는 풍경는 활기차기보다는 애잔하게 다가온다.
노예 탑으로 올라가는 좁은 나무 계단
노예 탑 2층 난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초입의 풍경
노예 탑의 정상부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 평야의 저 끝까지 한 눈에 들어 온다.
이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는 창에 총구를 대고 흑인 노예를 감시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차마 '아름담다'는 말을 하지 못하겠다.
노예 탑 아래에서 파는 즉석 사탕수수 주스
사탕수수라는 달콤한 작물로 돈을 벌기 위해 행해졌던 잔혹한 노예 착취의 역사를 간직한 이스나가


뜨리니다드 시내에서 봤던 고풍스러운 저택들의 화려한 유럽풍 건물들과 창살들도 모두 식민지 시대에 사탕수수 농장주들이 그렇게 혹독하게 흑인들의 노동을 착취하여 일군 부의 한 단면일 것이다. 마치 볼리비아의 수끄레에서 보았던 그 성당들과 건축물들의 새하얀 아름다움이 뽀또시의 은광에서 착취한 노동의 결과물인 것처럼. 

탑에서 내려와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 증기기관차에 올랐다. 달리던 기차가 멈추더니 기차 직원이 기차에서 내려 손잡이를 당겨 수동으로 철길을 바꿔가며 기차를 돌렸다. 그 사이 철로 주변에 사는 아이들이 맨발로 기차 옆으로 뛰어와 승객들로부터 과자를 받아 갔다. 받아가는 아이들도 즐겁고 주는 사람들도 유쾌하다. 식당칸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기차에서 파는 시원한 음료와 배낭에 싸온 간식거리를 먹으며 왔던 길을 다시 돌아왔다. 열차 칸 사이 계단에 앉은 형주는 장난기가 발동해 기차 밖으로 팔다리를 뻗으며 놀았다. 느릿느릿 달리는 증기기관차에서나 해볼 수 있는 장난이다. 


뜨리니다드로 돌아가는 길
기찻길 근처에 사는 아이들이 기차를 따라 나오자 승객들이 과자를 던져 준다.
증기 기관차에서만 가능한 장난
사람이 수동으로 철로를 바꿔 기차를 돌린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1>

<기찻길 옆 오막살이 2: 이 집에는 기저귀를 차는 갓난아기가 사는 모양이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3: 알록달록한 옷들이 빨랫줄에 만국기처럼 걸려있다.>

<기찻길 옆 풍경>


기차여행에서 돌아와 뜨리니다드 시내에 있는 시립 역사박물관에 들렀다. 1830년대에 지어진 사탕수수 대부호의 저택을 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당시에 사용하던 가구와 사진, 무기, 의복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가파른 나선형의 나무계단 위로 올라가니 건물의 옥상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곳에서는 뜨리니다드 시내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붉은 기와를 얹은 지붕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풍성한 아보카도와 야자수 나무를 마당 안에 한 두 그루씩 품고 있는 중세 도시의 풍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다.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도 그렇게 아름답고 행복하기를.


뜨리니다드 거리: 지친 제나를 업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싧 역사관 가는 길
거리 바닥에 박힌 동글동근한 돌과 그 사이로 자란 풀들이 참 예쁘다.
뜨리니다드 전경: 붉은 기와를 얹은 지붕들이 나무들과 잘 어울린다.
시립 역사박물관 앞 기념품 가판대. 알루미늄 캔을 재활용해 만든 카메라
뜨리니다드 거리 풍경


우리가 새로 옮긴 호스텔의 주인아저씨는 유명한 레스토랑의 주방장 출신이라서 이 집에 머무는 동안은 특별히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한다. 내가 짐을 풀고 주인아저씨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아이들은 숙소의 아기 강아지와 놀며 시간을 보냈다. 이곳에는 많은 여행자들이 머물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숙소 주인 가족과 금세 친해져서 매일 같은 시간에 온다는 한쪽 팔이 없는 빵아저씨의 맛있는 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내게서 돈을 타다가 따듯한 빵을 한 봉지 사 오기도 했다. 

소문대로 이 집의 리조또는 정말 맛있었다. 아이들이 애피타이저인 옥수수 수프가 맛있다고 하자 인심 좋은 아저씨는 냄비 채로 들고 나와서 덜어주셨다. 식사 후 주인아저씨는 3년 전 한국의 모 방송국에서 여행 프로그램 촬영차 뜨리니다드에 왔다가 이 숙소에서 머물다 갔다며 우리에게 그가 나왔던 방송을 보여주었다. 그런저런 이유에서였는지 한국 여행자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그와 그의 가족들은 감사하게도 우리 아이들에 대해 각별한 사랑을 주었다.


까사 주님집 할머니와 함께 동네 산책 나간 제나
까사 앞 거리의 밤 풍경
마음씨 좋은 까사 안주인이 편한 차림으로 거리에 나와 앉아 제나와 놀아주었다.


밤 9시경 마요르 광장 옆에서 벌어지는 왁자지껄한 살사 공연과 춤판을 구경하기 위해 아이들 손을 잡고 밤 산책을 나섰다.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소리를 따라 희미한 가로등이 비추는 밤거리를 걸어가니 작은 광장의 좁은 무대에서 이제 막 공연이 시작되고 있었다. 타악기 위주로 이루어진 반주에 대여섯 명의 가수들이 흥겹게 몸을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처음에 여유로웠던 돌계단 관객석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사람들로 들어찼다. 광장 옆의 레스토랑의 직원들은 그 틈을 용케 비집고 다니며 술과 음료를 주문받으러 다녔다. 그렇게 흥겨운 공연을 즐기고 있는데 제나가 졸리다고 보채기 시작할 무렵 우리 앞자리에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성이 제나만 한 딸을 데리고 남편과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네니 볼리비아 남편과 함께 여행 온 일본 여성이었다. 

공연이 막바지로 접어들자 무대 아래로 관객들이 나와서 춤판을 벌이기 시작했고, 그 일본 여성의 딸과 우리 제나는 엄마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살랑이는 밤바람에 시원하게 흔들리는 풍성한 나뭇잎들 아래, 정열적인 음악과 춤으로 한 몸이 된 가수와 관객들의 에너지로 뜨리니다드의 밤은 터질 것만 같다.  


마요르 광장 무대에서 흥겨운 쿠바 살사 공연이 시작되었다.
흥에 겨운 관객들이 모두 나와 살사 춤을 추며 한밤의 열기를 고조시켰다.
광장 옆 식당에서는 웨이터들이 나와 광장에 앉은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오가면 주문을 받아 날랐다.
흥겨운 사람들의 살사 춤판으로 무대 아래 공간은 발 디딜 틈 없이 꽉 들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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