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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화 Dec 29. 2017

카리브해의 간지러운 바람

쿠바, 뜨리니다드: 앙꼰 해변 - 2015/08/16(일)

어젯밤 공연을 보고 늦게 돌아온 탓에 아이들은 늦잠을 잤다. 나는 7시경 홀로 일어나 살며시 발코니로 나가 흔들의자에 앉았다. 카리브해에서 떠오른 태양이 기분 좋을 정도로 따듯한 아침햇살을 온 세상에 비춰주고 있었다. 숙소 건너편에 10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아름드리 아보카도 나무가 여전히 싱싱한 푸른 잎사귀와 보석처럼 빛나는 싱그러운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채 부드러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아보카도 나무만큼의 수령쯤 되어 보이는 키 큰 야자수가 부챗살처럼 길게 뻗은 이파리를 바람결에 흔들고 있었다. 그 바람이 내게도 불어와 온 몸의 털을 간지럽혔다.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고 아침햇살에 몸을 내맡겼다. 이 햇살, 이 바람, 이 풍경...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도록 온 몸으로 기억해 두리라.


숙소에서 보이는 아보카도 나무와 야자수
낡은 기와가 얹힌 지붕들


곧이어 제나가 아기 때부터 입술에 대고 자던 애착 이불을 껴안고 방에서 나오고, 욕실에서 형주가 씻는 소리가 들린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숙소의 주인아저씨에게 에콰도르의 끼또에서 사 왔던 참기름 한 병과 고추장 한 병을 맡겼다. 우리의 여행은 이제 끝나가고 있으니 다음에 이곳에 방문하는 한국인 여행자에게 전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잠에서 깬 제나가 애착 이불을 들고 내 곁으로 왔다.
쿠바 화폐. 특이하게도 3 페소와 20 페소짜리 지폐가 있다.
한국인 여행자를 특히 사랑하시는 숙소 주인아저씨


숙소 가족들과의 아쉬운 작별을 뒤로하고 우리는 앙꼰 해변으로 향했다. 저렴한 비용으로 질 좋은 음식과 멋진 바다를 즐길 수 있는 이곳 앙꼰 호텔에서 하루를 보내기 위해 비냘레스에서 미리 예약해두었다.(성인 1인당 40 CUC, 유아는 19 CUC) 카리브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 중 하나인 앙꼰 해변에서 우리 트리오가 1박 2일로 묵는데 10만 원 정도인 셈이니, 이만한 가격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일 것이다.


앙꼰 호텔 가는 택시 안. 내부 커버와 스피커, 뒷좌석 시트까지 성한 게 별로 없다. 그러나 그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예술이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짐을 방에 풀자마자 아이들은 야외 풀장으로 향했다. 어린 제나가 처음에는 엄마랑 놀자고 내 손을 잡아끌었지만 곧 또래 친구들을 만나 재미있게 놀기에 나는 슬그머니 나와서 파라솔 아래 누웠다. 더운 날씨였지만 파라솔 아래 가만히 앉아있으면 바닷바람이 기분 좋게 온몸을 쓸어준다. 가볍게 살사 음악이 흐르고, 야자수 잎사귀가 사르락 거리며 바람에 흔들리고, 푸른 하늘 아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공간을 채우다가 흩어졌다. 

그렇게 하늘 종일 풀장에서 놀고 수영장이 문 닫을 시간이 돼서야 샤워를 하고, 해지는 카리브해를 보러 해변으로 나갔다. 붉게 물드는 바다를 느긋하게 거닐며 즐기는 연인들과 가족들의 풍경은 우리가 흔히 엽서에서 보아왔던 붉은 석양을 배경으로 한 카리브해의 바다와 백사장, 그리고 그 위에 드리워진 야자수의 모습 그대로 아름답고 낭만적이다. 


풀장에서 만나 바로 친구가 된 아이들. 말도 통하지 않는데 서로 참 잘 논다.
하루 종일 노니 행복하니?
호텔 식당 음식은, 이 가격에 이래도 되는 걸까 싶을 만큼 다양하고 신선하고 맛있다.
숙소에서 바라 보이는 바다
체크아웃하는 옆 방의 세 딸들
풀장 옆 장기 판에서 동갑내기 친구와 노는 제나
풀장이 폐장하고 나서는 해변에서 모래놀이를 했다.

 

해 저무는 앙꼰 해변의 풍경
앙꼰 해변에 남긴 우리 발자국
노을 지는 해변을 거니는 연인들
노을 지는 해변 속의 남매
그리고 소녀의 빛나는 미소


호텔 식당에서 온갖 종류의 해산물 요리와 한껏 달고 과즙이 흘러넘치는 다양한 열대과일들을 신나게 먹고 아이들은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나는 호젓하게 밤바다를 즐기고 싶은 마음에 바다가 있는 호텔 복도 쪽으로 나가 밤바다의 노래를 감상했다. 낮 동안의 그 영롱한 푸른빛을 이제 검게 물들이고 그저 바닷가의 모래를 훑는 소리만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는 밤바다와 그 위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는 별들, 그리고 내 치맛자락을 부드럽게 흔드는 바람. 다른 나라였다면 밤늦도록 유흥을 즐기는 사람들로 아직 시끄러운 시간이었겠지만, 이곳은 간간이 들려오는 아이들의 기침소리 외에는 오가는 사람도 없이 고요하다. 이렇게 조용한 밤바다를 오롯이 혼자서 가질 수 있는 앙꼰의 밤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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