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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화 Dec 29. 2017

Viva la vida!(인생, 만세!)

멕시코, 멕시코 시티: 프리다 칼로 박물관 - 2015/08/20(목)

우리 라틴 아메리카 여행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오늘 새벽에 도착한 탓에 환전을 못했기 때문에 일단 환전부터 해야 했다. 호텔 직원에게 환전소의 위치를 물어봤더니 바로 길 건너에 있는데 위험할 수 있으니 자기가 친히 함께 가주겠다고 나섰다. 그의 친절이 고맙기도 했지만 치안이 얼마나 불안하면 이렇게까지 할까 싶어서 더 바짝 긴장되었다.  

저녁 8시 비행기를 타고 LA로 가야 하니 멕시코시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나절 정도인 셈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이나 공원, 유명한 궁전이나 피라미드가 있는 사원, 유럽식 대성당이나 미술관, 제대로 보기에는 하루 24시간도 부족하다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국립 인류학 박물관... 그 모든 곳을 다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 유명한 장소들을 포기하고 우리가 선택한 곳은 멕시코를 대표하는 여성 화가인 프리다 칼로(Frida Kahlo) 박물관이었다. 멕시코시티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겨우 도시 외곽에 있는 화가의 작은 박물관이라니 너무 의외의 시시한 선택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거리를 걸으며 도시를 둘러보고, 지하철로 이동하며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버스 창밖으로 도시 외곽의 풍경도 보고, 평소 좋아하던 화가가 살던 집에 전시된 작품들도 볼 수 있는, 소박하지만 실속 있는 한나절의 여행이 될 것이다.

환전 후 아침 식사를 위해 호텔 앞 포장마차에 들렀다. 제나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포장마차 아저씨들은 따꼬의 속을 종류별로 맛보라며 일일이 떠주었다. 우리는 맛있고 양도 많은 따꼬를 종류별로 하나씩 주문해서 다섯 개를 먹고 병에 담아 파는 진한 망고 주스를 세 병이나 마시고는, 점심때 먹으려고 따꼬 두 개를 더 포장해서 가방에 넣었다. 포장마차의 두 아저씨는 어린 제나가 따꼬를 흘리면서 어렵게 먹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일회용이 아닌 두고 쓰는 스테인리스 숟가락을 빌려주었다. 아이들을 예뻐해 주는 그들의 마음이 고마워서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는 다녀와서 꼭 돌려주겠다고 약속하고 길을 나섰다.



프리다 칼로 박물관에 가려면 2호선 헤볼루시온(Revolucion) 역에서 메뜨로를 타고 한 정거장 떨어진 히달고(Hidalgo) 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고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꼬요아깐(Coyoacan) 역에서 내려야 한다. 메뜨로를 타러 헤볼루시온 역까지 가기 위해 대로변을 걷는데 깨끗하고 넓은 거리와 시원하게 쏟아지는 분수대와 조각상들, 초고층 건물들이 즐비한 모습이 마치 서울 도심의 여느 거리를 걷는 느낌이었다. 

거리에서는 가판대에 물건을 파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는데, 아이들은 컵에 과일을 담아 파는 가판대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볼 때마다 사달라고 졸랐다. 컵에 담긴 과일 중에서 특히 수박이 어찌나 달고 맛있는지 그걸 들고 있으면 꿀벌들이 달려들곤 해서 기겁하며 도망 다니면서도 수박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온갖 종류의 과일을 큰 컵 하나에 담아 파는 노점상. 수박에 수박씨 보다 많은 벌들이 붙어 있다.


출근시간이 지난 시각이어서 메뜨로는 한산했다. 다른 라틴 아메리카의 메뜨로에서처럼 역의 이름 옆에는 그 역을 대표하는 그림이 아이콘처럼 따라붙어있어서 역마다 그 그림을 확인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꼬요아깐 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프리다 칼로 박물관으로 가야 하는데 어떤 버스를 타야 할지 몰라서 오는 버스마다 붙잡고 일일이 물어보고 있자니 그런 우리를 보던 아가씨들이 자기들도 그곳으로 간다며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작은 마을버스가 시내를 돌아 고급스러운 주택가로 들어서자 그 아가씨들이 우리에게 내리라고 손짓하기에 그들을 따라 내렸다. 그리고 10분 정도 도시 외곽의 여유로운 주택가를 걸어가니 온통 파란색으로 칠해진 프리다 칼로의 집이 나왔다.

프리다 칼로의 집 앞에서 따꼬를 먹는 남매. 뒤로 보이는 청록색 문에 멕시코와 아르헨티나 국기가 함께 그려진 모습니 인상적이다.

 

1907년에 멕시코에서 태어난 프리다 칼로는 일곱 살에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쪽 다리를 절게 된 데다, 열여덟 살에 심한 교통사고를 당해 오른쪽 다리와 척추, 자궁을 심하게 다쳐서 이후 30 차례 넘는 수술을 받으며 평생을 죽음보다 가혹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다. 멕시코 민중 벽화의 거장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으나 그의 문란한 사생활과 세 번의 유산을 겪으며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상실감으로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렸다. 폐렴으로 1954년 사망하기까지 겪어내야 했던 육체적 고통과 상처받은 여성으로서 겪었던 정신적인 고통을 삶에 대한 강인한 의지로 이겨낸 그녀는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그림으로 그려내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었다. 


칼로의 사진. 자화상 속의 그녀보다 훨씬 아름답다.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
Wo will need hands if he had wings?
두려운 듯 담대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멕시코 소녀. 주로 여성을 작품의 소재로 썼다.
남편의 배신으로 마음의 상처를 받은 자신의 내면을 표현한 작품
수차례에 걸친 유산으로 임신이 불가능해진 자신의 몸을 표현한 작품
그녀의 다른 작품들과 구성이 다른, 보다 초현실적인 작품


온통 파란색으로 칠해진 이 집은 남편 디에고가 그녀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집의 내부와 작은 정원은 예술가의 공간답게 아기자기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입구에서 왼편으로 이어진 방에는 그녀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이어진 공간은 과거 그녀가 생활했던 방들을 그대로 재현해두었다. 


칼로를 사랑했지만 가장 큰 상처를 준 멕시코의 민중 화가, 디에라 리베라
러시아 혁명기에 망명중이었던 트로츠키와 우정을 나누었던 칼로. 이것은 디에고의 작품인 듯 하다.
칼로의 거실
칼로의 침실
칼로의 주방. 화가의 주방답게 화려하고 단정하다.
칼로가 휠체어에 앉아 그림을 그리던 자리
정원에서 실내로 들어가는 문. 불편한 몸으로 이 문을 드나들었을 칼로를 생각하니, 그 모습이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게 그려진다.
칼로의 정원
벽에 걸린 얼굴 모양의 조형물
벽을 장식한 멕시코 민속 토우들


나 역시 아이들의 수준과 별반 다르지 않은 수준의 예술적 감각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녀의 작품들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정물화인 'Viva la vida'(인생, 만세)였다. 검은빛이 감돌만큼 짙은 초록색의 완전체 수박이 가운데 놓여있고 그 주변에 각각의 다른 모습으로 쪼개진 수박들이 겉껍질의 진초록과 대비되는 새빨간 속을 드러내고 있다. 맨 왼편의 반으로 쪼개진 수박에는 하얀 테두리로부터 까만 씨들에 연결된 하얀색의 실선들이 어렴풋이 비쳐 보이는데 마치 사람 몸속의 혈관 같은 느낌이다. 맨 오른편의 수박은 악어 이빨처럼 멋을 낸 모양으로 날카롭게 조각되어 있는데 예쁘기보다는 다소 섬뜩하게 보인다. 그리고 맨 앞에 4분의 1 조각으로 쪼개진 수박에는 작품의 제목과 그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마치 핏빛 살에 새겨진 상처처럼. 

돌이켜 보면 이 작품을 접하기 전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수박을 이렇게 강렬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공처럼 둥근 모습과 초록과 검정의 재미있는 패턴, 쪼갰을 때 보이는 하얀 테두리와 발그레한 과육, 쏘아 올린 폭죽처럼 동그랗게 박혀있는 까만 씨앗들, 그리고 전혀 신맛이 없이 부드럽게 달콤한 맛과 과즙이 많고 씹으면 녹아버리듯 사라지는 과육까지 모든 특징이 그저 둥글고 부드럽고 풍부한 느낌이었는데, 프리다 칼로의 작품 속 수박은 고통받고 상처받아서 피를 뚝뚝 흘리는 느낌이다. 그렇게 상처와 피로 얼룩진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 있는 것 같은 이 작품의 제목은 아이러니하게도 삶을 칭송하고 있다. 고통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더 뜨겁게 살아야만 한다는 처절한 자기 암시처럼. 

평소 영국 음악밴드 Cold play가 노래하는 동명의 음악인 'Viva la vida'를 좋아하던 형주는 이 작품을 어떻게 느꼈을까. 빠른 비트와 에너지 넘치는 리듬, 그리고 패망한 어느 왕의 화려했던 과거와 죽음을 앞둔 심경을 담은 노랫말이 이 그림과 만나서 그의 마음속에 어떤 이미지로 남게 될지 궁금하다. 그림을 보며 있는 아이들이 서있는 공간이 엄마인 내게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멋진 작품이 되었다.

칼로의 작품 'Viva la vida!(인생, 만세!)'


프리다 칼로의 집에서 나와 숙소로 이동해서 숙소 앞 포장마차에서 빌렸던 숟가락을 돌려주고, 숙소에 맡겨두었던 배낭을 찾아 짊어지고 공항으로 향했다, 여행했던 도시를 떠나던 그 여느 때처럼. 그러나 마음만은 여느 때와 같지 않다. 

차창을 열고 밖으로 보이는 멕시코시티의 늦은 오후 풍경을 눈에 담으려니, 4개월 남짓한 여행기간 동안 있었던 그 수많았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추억들이 떠올라 코끝이 찡해졌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아니면 자기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곧 아빠를 만날 마음에 들떠서 재잘거리는 제나 옆에 앉은 형주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눈물이 나올까 봐 애써 아들의 눈을 외면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Adios, Mexico!(멕시코여, 안녕!)”

“Salud, Latin America!(라틴 아메리카여, 그대들의 나라에 축복을!)”




멕시코 지폐 속 프리다 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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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면세점에서 발견한 프리다 칼로의 책
멕시코를 떠나는 공항에서 솜브레로를 쓴 남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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