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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화 Dec 29. 2017

내 여행 동반자에게 쓰는 편지 1

열여섯 살이었던 아들에게

중2의 2학기를 시작할 즈음, 학교 공부를 중단하고 여행을 떠나자는 내 말에 '이건 무슨 종류의 농담이지? '라는 듯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당황해하던 네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단지 성적이 뛰어나지 않았을 뿐 큰 사고를 친 것도 아니고 친구들과 더할 나위 없이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 네게는 마른하늘에 날 벼락같은 말이었겠지. 

딱히 너의 중2 생활을 ‘중2병’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지는 않았어. 전과는 달라진 네 모습이 놀랍고 당황스러웠고 때로는 홀로 상처받아 눈물 흘린 적도 있었지만, 네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고 나를 다독였지. 

하지만 사춘기 질풍노도의 파고가 높아질수록  그와 반비례하여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사그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엄마는 마음 아팠단다. 그래서 널 새로운 세상에 발 딛고 서게 하고 싶었어. 진짜 세상의 아찔한 높이와 광활한 넓이를 온몸으로 체험한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스펙트럼이 더 넓어지고 사유의 깊이가 더 깊어지지 않을까 싶었지. 다른 그 어떤 이유보다 우리를 여행으로 이끌었던 가장 강력한 이유는 바로 너였단다.

그렇다고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는 마. 함께 여행했던 우리 셋 중에 가장 신났던 사람은 바로 나였으니까. 미혼의 젊은 나이에 홀로 떠나는 여행이었다면 나 하나만 책임지면 되니 더 자유롭고 더 많이 누릴 수 있어 좋긴 했겠지만, 그게 엄마로서 내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보다 좋을 수는 없으니까. 아무리 어려운 상황도 기꺼이 즐겁게 헤쳐 나갈 힘이 불끈불끈 솟았단다. 

여행에 앞서 고입검정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학원을 다니며 만났던 사람들과 상황들 또한 너에게는 새로운 세계였을 거야. 불우한 가정 형편으로 늦은 나이에 공부하는 어른들과 몸이 아파 등교 일수를 채우지 못해 학교를 그만둔 네 또래 아이들, 그리고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할 자신들만의 이유로 학교에서 공부하지 못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만은 아니란 걸 느꼈을 테지. 학교 수업시간일 시간에 학교가 아닌 다른 공간에 있는 너를 이상하게 보던 주변 시선과, 학생증이 없으면 청소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혜택을 받지 못하는 등의 경험하면서 짧은 기간이었지만 학교 밖 냉엄한 세상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겠고.

고입검정고시를 마치고 제대로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서둘러 떠난 여행길에 마주한 낯선 상황들은 또 너를 얼마나 당황하게 했을까. 

우리의 첫 여행국이었던 브라질에서 포르투갈어를 몰라서 음식도 주문하지 못하고, 길도 못 찾고, 동양인이라고 무시당하기도 하고, 평소에 잘난 체 하며 마치 원더우먼이라도 되는 양 모든 걸 다 해결해주던 엄마라는 사람도 너 보다 나을 게 없이 너랑 똑 같이 버벅대로 헤매고 있었으니, 세상에 믿을 거라고는 너 자신밖에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 되기도 했겠지. 

브라질에서 언어 때문에 고생을 하고 난 후 아르헨티나에 들어서면서 간단한 스페인어를 구사하며 영어가 안 통하는 현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곁에서 엄마를 돕겠다고 나서던 네 모습이 얼마나 대견하고 든든했는지 모른단다. 말이 안 통하면 손짓 발짓하며 기어코 원하는 바를 전달하고야 마는 너를 뒤에서 바라보며 눈물이 찔끔 나왔던 적도 있었어. 

어릴 때부터 엘리베이터에 서면 습관적으로 나를 나란히 세우고 네 키가 내 어디쯤까지 자랐는지를 확인하며 나를 '키 재는 자' 쯤으로 여기던 네게 내가 더 이상 키 재는 자로의 쓰임이 없어진 것은 아르헨티나의 바릴로체에서였어. 우연히 거울 앞에 나란히 섰는데 네 키가 내 키를 넘어서 있더구나. 신나서 환호성을 지르고 날뛰던 너를 말없이 바라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단다. '그저 보호의 손길만을 필요로 하는 것만 같았던 그 어린 꼬마가 어느새 이렇게 청년이 되어가고 있구나…, 이제 엄마로서의 내 역할도 바뀌어야 하겠구나….' 

여행하며 그동안 몰랐던 너의 새로운 모습과 네가 엄마인 나를 물리적으로 때로는 정신적으로 넘어서며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도 덩달아 성장하고 있음을 느꼈던 적도 많았어.


그런 너의 손을 잡고 우린 함께 브라질의 예수 상에 올랐고, 리우의 해변에서 뛰어놀았고, 이과수의 어마어마한 폭포수를 온몸으로 맞았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땅고 음악에 흠뻑 빠지기도 했고, 바릴로체의 아름다운 호수를 함께 바라보았고, 깔라파떼의 빙하 위를 걸었지. 

우루과이의 흙빛 라쁠라따 강가에서는 오후 햇살을 받으며 노곤하게 낮잠도 즐겼고. 

칠레에서는 또레스 델 파이네의 숨 막히는 대자연 속을 거닐며 그 위대함에 경이로움을 느꼈고, 산띠아고의 예술이 넘치는 광장과 거리를 함께 거닐었고, 발빠라이소 네루다의 집에서는 바다를 향해 빼곡히 들어선 언덕 위의 집들을 함께 바라보았고, 아따까마의 거친 사막에서는 그 황량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막의 석양을 감상했지. 

볼리비아 우유니의 소금사막에서 밤하늘을 그대로 반사한 소금사막 위에 서서 우주의 어디쯤에 서 있는 듯 한 황홀감을 경험했고, 뽀또시에서는 온통 험한 산으로 둘러싸인 산 정상의 온천 호수에 몸을 담그기도 했고, 수끄레의 새하얀 거리에서 새까만 초콜릿을 맛보았고, 라빠스의 울창한 밀림 로스 융가스에서는 천 길 낭떠러지 위의 아슬아슬한 데스 로드에서 자전거를 타고 달렸고, 띠와나꾸의 동짓날 축제에 가서 인디오들과 어울려 그들의 의식에 동참하기도 했고, 꼬빠까바나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넓은 호수인 띠띠까까 호수에서 잡은 송어로 요리한 음식도 먹었고, 잉카의 시조 신화를 간직한 태양의 섬에서 그 좁은 돌담길을 줄지어 가는 당나귀와 양 떼들의 등을 쓰다듬기도 했어. 

페루의 꾸스꼬에서는 험준한 산 위 돌의 도시 마추삑추에 올랐고, 나스까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고대 잉까인들이 사막 위에 그린 그림을 감상했고, 이까 사막에서는 고꾸라질 듯 스릴 넘치게 달리는 버기카를 탔고, 리마에서는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도둑맞아 여권을 잃어버려서 아무것도 못하고 임시여권 발급하는 일과 여권 재발급에 필요한 일들만 보느라 일정을 다 써버렸지. 

임시여권으로 야간 버스를 타고 간신히 에콰도르로 넘어왔는데 이번에는 짐이 오지 않아 꿈에 그리던 갈라파고스를 목전에 두고 또 마음을 졸였었잖아. 다음 날 새벽에 다행히 짐을 찾아 기적적으로 갈라파고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그곳에서 온갖 신비로운 동물들과 경이로운 자연을 만났어. 끼또에서는 적도 선을 밟아보았고, 바뇨스에서는 깊은 계곡에서 캐노피와 캐녀닝을 즐겼고, 아찔한 절벽 위에서 세상 끝 그네를 타기도 했지.

콜롬비아의 깔리에서는 손을 맞잡고 살사 춤을 배웠고, 온통 벽화로 둘러싸인 보고타에서는 그라피티 투어를 하며 예술의 새로운 장르를 경험했어. 

쿠바로 들어가는 길에 들렀던 멕시코의 깐꾼에서는 지하 천국 세놋떼에서 헤엄을 치고, 인신공양을 했다던 치첸잇사의 피라미드에도 갔었지. 드디어 도착한 쿠바의 아바나에서는 헤밍웨이의 바다를 만났고, 말레꼰 해변의 올드카가 달리는 길에서는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의 음악을 만났고, 비냘레스에서는 아름다운 자연과 정겨운 시골사람들을 만났고, 뜨리니다드에서는 증기기관차를 타고 과거로의 여행을 다녀왔고, 광장에서 열렸던 열정적인 밤의 살사 파티에도 갔으며, 산따 끌라라에서는 우리를 남미로 이끈 혁명가 체 게바라를 만났었지. 

다시 멕시코로 나와 멕시코시티에서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프리다 칼로를 만났고, 맛있는 거리 음식을 먹으며 마지막 도시에서의 하루를 아쉬워했었지. 우리가 여행했던 그 나라들, 도시들, 여행지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 다 기억하니?


여행 내내 호스텔만을 고집하며 여행했던 탓에 한국에서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거친 잠자리에서 벌레와 사투를 벌이며 잠을 자야 했고, 일정 상 끼니때를 놓치거나 먹거리를 구하지 못해 때때로 주린 배를 움켜쥐고 배고픈 채로 버텨야 했으며, 무슨 객기였는지 현지인 시장에서 상온 보관된 고기를 사다 먹었다가 배탈이 나서 일주일 가까이 침대에 누워서 지내기도 했지. 국경을 넘거나 먼 거리를 이동할 때 장거리 야간 버스를 타느라 좁고 불편한 버스 좌석에서 몸을 쭈그리고 자거나 때로는 지나치게 추운 버스 냉방 때문에 벌벌 떨기도 하고, 험한 사막 길에 멀미를 하며 위장을 말끔히 비워내기도 했던, 그야말로 몸이 혹사당했던 여행이었지만, 진짜 여행이란 이런 거라며 그 모든 불편함을 받아들이고 유쾌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던 네 덕분에 우리가 여행을 잘 마칠 수 있었지 않았나 싶다. (단, 매일 아침 볶음밥을 만들어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며 너와 네 동생의 굶주림에 대비했던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볶음밥에 들어간 파프리카 때문에 밥을 안 먹겠다며 고집을 피우던 너에 대한 서운함은 여전히 내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다. 그렇게 파프리카가 싫으니?)


그렇게 4개월 남짓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사람들은 여행 후 네가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해 가장 궁금하게 생각했단다. 사춘기의 정점에 있던 너의 질풍노도가 어느 정도 잠잠해졌는지,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좀 더 넓어졌는지,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되었는지 등등. 네게서 눈에 보이는 변화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웠겠지만 여행을 다녀온 이후의 너는 평범하고 성실하게 고등학교에 다니며 여전히 컴퓨터 게임을 즐기는 열여덟 소년이 되었다. 여행이 만병통치약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마는 세상에 만병통치약이 어디 있겠니? 우리가 함께 했던 순간들의 소중한 기억들로 우리의 여행은 충분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니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다만, 소박하게 바라는 것이 있었다면 우리가 함께 했던 여행의 시간이 앞으로 펼쳐질 너의 긴 인생에 작게나마 양의 변곡점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 그뿐이다. 


형주야,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여행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흐릿해지겠지만, 인생을 살면서 때로 네가 짊어진 짐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거나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잘 몰라 헤매게 될 때 우리의 여행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우린 어떻게든 각자 짊어진 짐의 무게를 이겨냈고, 비록 조금 멀리 돌아갔을지언정 원하는 곳으로 가는 길을 찾았잖니. 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벽에 부딪히면 의기소침해지지 말고 손짓 발짓하며 네 생각을 전했던 열여섯 소년이었던 너를 기억해 내길 바라.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 외로울 땐 셋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림자 길게 늘어뜨리고 터벅터벅 함께 걸었던, 함께여서 힘을 낼 수 있었던 그 길들을 기억해내길, 그렇게 우리의 여행이 네 인생에 작은 힘이라도 되어주길 엄마는 소망한다.


에콰도르 갈라파고스의 산타 크루즈 섬, 거북이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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