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 2015/05/03(일)
라보까 항
숙소에서 64번 버스를 타고 라 보까 항구로 향했다. 항구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에서 내렸을 뿐인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주변에 온통 폐허로 보이는 낡은 건물들뿐이었고 인적이 드문 길에서 어쩌다 만나는 사람들의 옷차림과 눈빛에서 위험을 직감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사람들로 붐비는 항구 쪽으로 걸었다.
단 몇 블록을 사이에 두고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원색으로 알록달록 페인트를 칠한 환하고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거리 양옆으로 늘어서 있었고, 1층의 식당마다 탱고 음악을 틀어 두고 땅고 댄서들의 춤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길 양옆에 늘어선 가판대에서는 각종 기념품과 하늘색 줄무늬의 아르헨티나 축구셔츠를 판매하고 있었고 마라도나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나온 남성이 공을 가지고 재주를 부리며 지나가는 사람들과 사진을 찍어주며 팁을 받고 있었다. 우리네 쌈지골목처럼 작은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은 2층 건물에는 탱고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관련된 다양한 기념품과 그림들이 전시·판매되고 있었다. 밝은 원색으로 칠해진 건물과 탱고 음악과 춤, 그리고 그곳을 찾은 사람들의 활기는 딱 그 거리까지였다. 거리 끝에는 경찰이 지키고 서서 관광객들이 그 거리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돕고 있었다. 이것이 탱고가 시작된 항구의 현재 모습이다.
라보까는 아르헨티나 최초의 항구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3백만 명의 유럽 이민자들이 '아르헨티나 드림'을 좇아 이 항구를 통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건너왔다. 그러나 가난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생선 썩은 내가 진동하는 통조림 공장이라는 또 다른 지옥이었다. 그런 가난한 공장 노동자와 부두 노동자, 선원들은 이 항구에서 술과 음악과 춤으로 삶의 애환을 달랬는데, 그들 사이에서 탄생된 것이 바로 '춤추는 슬픔'이라고 불리는 탱고이다. 아프리카 노예들의 음악 깐뚬베에 쿠바 선원들의 무곡 아바네라, 그리고 아르헨티나 목동의 밀롱가가 섞여 만들어진 땅고 음악은 강렬하지만 애절하고 절제된 춤 동작과 만나 절정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한 때 하층민들의 더럽고 음탕한 춤이라 하여 아르헨티나 상류사회로부터 멸시당하고 금기시되기까지 했던 탱고는 유럽으로 전해져 그들로부터 열광적인 사랑을 받은 후 다시 아르헨티나의 상류사회로 돌아와 고급문화로 자리잡음으로써, 문화가 아래로부터 위로 역류하는 드문 현상을 설명하는 상징이 되었다.
탱고라는 이 매력적인 예술의 원류를 찾아 라 보까항을 찾아온 사람이라면, 항구 주변의 풍경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관광객을 위해 영화의 세트장처럼 꾸며진 이 짧고 어색한 거리에 조금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산뗄모 주말 노천시장
라보까항에서 택시를 타고 산 뗄모로 향했다. 일요일에만 열리는 노천시장과 거리 예술가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다.
노천시장 초입의 도레고 광장에는 골동품을 파는 가판대가 모여 있었는데 규모가 상당히 커서 마음먹고 돌아보려면 하루도 부족할 듯했다. 식기류에서 장식품, 가구류, 유아용품, 책, 그림, 동전 등 세월에 바래지고 손때 묻은 물건들이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짐의 무게를 신경 써야 하는 여행자가 아니었다면 쭈그리고 앉아 몇 시간이고 물건 고르는 재미에 푹 빠졌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게 참 아쉽다.
광장을 지나 이어진 데펜사 거리에는 거리 음악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거리에 업라이트 피아노를 옮겨 놓고 반도네온(탱고 음악의 애절함을 가중시키는 소리를 가진 손풍금)과 바이올린의 협연을 펼치는 반바지 티셔츠 차림의 젊은 악사들, 기타와 반도네온만으로 완벽한 땅고를 연주하는 노련한 할아버지 연주자들, 중절모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전설적인 땅고 가수인 까를로스 가르델을 흉내를 내며 노래 부르는 사람들 까지, 거리는 온통 음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연주공간이 훌륭한 정식 무대는 아니라 할지라도, 어쩌면 탱고를 잘 모르는 여행자들의 얕은 취향을 겨냥해서 동전이나 몇 푼 얻어내려는 속셈이라 할지라도, 지금 여기에서 그들은 최고의 음악가임에 틀림없다.
음악의 거리를 벗어나면 기념품이나 먹을거리를 파는 가판대와 마리오네트 공연, 동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멈춰 섰다가 갑자기 움직이는 행위예술가 등 다채로운 공연으로 산뗄모 거리 전체가 온통 축제의 분위기다. 노천식당에서 점심도 먹고, 기념으로 각자 팔찌도 사고, 거리의 가판대에서 파는 곱창볶음, 빵, 과일주스, 봉지 땅콩 등 온갖 주전부리를 다 먹으며 한참을 걸어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끝없이 이어진 주말 벼룩시장은 하늘에 만국기가 휘날리는 운동회처럼 들뜨고 재미있었지만 아이들은 그 길을 다 돌아보기도 전에 지쳤다.
숙소로 돌아와 아이들이 쉬는 동안 밀린 빨래를 해서 숙소의 옥상에 걸어 두고 옥상 한 구석에 앉았다. 서늘한 저녁 바람에 빨래는 참 잘 마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