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이거나, 혹은 선각자이거나

아르헨티나, 바릴로체: 시비꼬 - 2015/05/09(토)

by 민경화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서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숙소에서 뒹굴고 있었다.

보통의 경우 날씨 때문에 숙소에 발이 묶이는 경우 답답하거나 하루를 낭비했다는 생각에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인데 1004 호스텔에서는 전혀 그런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숙소에서 보이는 전경이 훌륭했다. 우리는 오전 내 숙소에서 뒹굴거리다가 어제 이스라엘 청년에게서 배운 토마토 요리로 점심을 해 먹고 오후에 동네 산책을 나갔다.


99880D3359F2A83904912F 이스라엘식 토마토 요리


센트로 시비꼬 바로 옆 거리에는 화려한 초콜릿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스위스 이민자들이 정착해 만들어진 바릴로체는 스위스 전통방식으로 만든 초콜릿이 유명하다. 가게마다, 마치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의 하얀 할아버지 마네킹처럼, 스위스 전통의상을 입은 할머니 마네킹이 서 있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이 집 저 집에서 맛보라고 주는 초콜릿도 먹어보고 그중 가장 유명하다는 곳에 들어가 셋이서 각자 초콜릿을 한 개씩 골라 사 먹기도 했는데 진한 맛과 맛과 독특한 모양에 예쁜 포장이 더해져 여행자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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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D9443359F2A93A3E02EE 시비꼬의 메인 광장. 어떤 항의의 뜻으로 광장 바닥에 그려진 두건 쓴 빈 얼굴들
99F9893359F2A88C0441A0 화려한 초콜릿 가게들
99A96A3359F2A88E17B5BC 초콜릿 할머니 마네킹
990EF43359F2A89003390E 초콜릿 바른 아이스크림


초콜릿 골목을 벗어나서 호숫가 길을 따라 걷다가 언덕배기에 세워진 동네 장승을 만났다. 우리네의 장승처럼 얼굴 모양이나 옷차림이 구체적이지도 표정이 과장되지도 않은 아르헨티나의 장승은 그저 원목에 남녀가 구분될 정도의 윤곽만 조각한 소박한 모습이었다. 이들은 어떤 소망을 담아 호숫가 탁 트인 이곳에 장승을 세운 것일까 궁금하다.


99C0053359F2A93C1F9FCA 아르헨티나 장승 커플


궂은 날씨 때문에 동네 마트에 들러 일찌감치 저녁 장거리를 봐서 숙소로 돌아왔다.

남쪽의 깔라파떼에서 올라온 한국인 여행자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다가 동네 성당으로 토요 미사를 함께 가자는 말에 그것도 좋은 경험이겠다 싶어서 그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할아버지 신부님이 우리가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낮게 말씀하시면 신자들이 따라서 읊조리고 성당 내부를 울리는 찬송가가 경건하게 사람과 사람 사이를 통과해서 성당 전체를 감돌았다. 불가해한 사람들의 음성이 새소리나 물소리, 바람소리처럼 소리의 원형으로 들려왔다. 늘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으며 살아왔지만 인간의 언어를 의미가 아닌 그저 하나의 ‘소리’로 들을 수 있었던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30분쯤 지났을까, 어둑하고 왠지 무거운 분위기에 자유로운 행동을 제약받는 것이 싫었던 제나가 밖으로 나가자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형주를 일행들과 남겨두고 제나를 안고 살며시 예배실 밖으로 나왔다. 성당의 출입문과 예배실 입구 사이의 공간에서 예배가 끝나길 기다리는데 그 공간에 전시된 한 사람의 일대기가 눈에 들어왔다. 에스파뇰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그림으로 봐서는 이 지역이나 아르헨티나에서 최초의 인디오 신부를 배출했다는 내용인 듯했다. 이 성당의 자부심이 된 그의 일대기를 보며 문득 질문이 하나 떠올랐다.

‘그는 과연 선각자였을까, 아니면 배신자였을까.’

자신의 조상과 자신이 오랜 세월 동안 지켜왔던 토속신앙을 버리고 침략자가 가져온 새로운 종교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인 사람. 그것이 일신의 안위와 출세를 위한 것이었다면 그는 배신자이겠고, 침략자들에 의해 들어온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이 속한 사회를 더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에 의한 개종이었다면 그는 선각자일 것이다. 지금은 토속 신앙까지도 그 속에 녹여내어 이 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종교가 된 가톨릭의 놀라운 힘과 그런 융합을 가능케 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을 수많은 인디오 신부들을 떠올리며 괜히 혼자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건 식민의 역사를 가진 나라의 백성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일 것이다.


99F2A63359F653C01B5D5C 미상 중간에 예배실 밖으로 나온 제나. 인디오 아이들을 보듬고 있는 마리아상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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