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바릴로체: 샤오샤오 공원,캄파나리오 언덕-15/05/08(금
쫓겨 나가야 하는 아침이 기어이 밝아오고야 말았다.
눈을 떠 창밖을 보니 10층 높이에서 바릴로체 시내와 호수가 바라다 보이는 풍경은 야속하게도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아름다웠다. 이 호스텔의 인기 비결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표정으로 호스텔 관리인에게 우리가 머물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한번 더 부탁해 보았으나, 자신도 이런 상황을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다른 숙소를 알아보러 나와서 시비꼬 근처의 숙소 서너 곳을 둘어 보았으나 다행히도(?) 우리가 머물만한 마땅한 방이 있는 숙소가 없었다. 다시 1004 호스텔로 돌아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벼랑 끝 작전으로 한번 더 설득해보았다. 관리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호스텔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고 한참을 통화하더니 우리가 머물러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성인들의 공간에 아이들이 함께 지내다 보면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 규정을 만든 것이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멋진 전경과 훌륭한 주방과 라운지 공간을 가진 데다가 개념 있는 호스텔의 경영 철학까지 겸비한 이 호스텔에 머물었던 7박 8일의 시간은 우리가 바릴로체에서 누렸던 최고의 행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숙소에서 만난 일행과 함께 버스를 타고 작은 순환코스 중 하나인 샤오샤오 시립공원(Parque Municipal Llao Llao)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우엘 우아삐 호수(Lago Nauel Huapi)를 끼고 빠뉴엘로 항구(Puerto Panuelo)로 가는 길의 창밖 풍경은 공기마저 투명하고 달게 느껴질 만큼 깨끗하고 선명하다.
샤오샤오 시립공원에 위치한 호텔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니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것과 같은 넓고 푸른 들판이 펼쳐졌고 그 앞에는 높고 험준한 안데스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남미의 알프스라는 별명이 전혀 무색하지 않을 만큼 눈부시게 아름답다.
언덕에서 호수 쪽으로 흙길이 나있어 그 길을 따라 내려갔다. 금발머리처럼 노랗게 마른풀들이 바람결에 흔들리고 키 큰 나무들이 길의 양옆으로 늘어서 있는 그 길은 만화영화 ‘프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네로와 소년의 개 파트라슈가 우유 수레를 끌고 가는 길을 연상시킬 만큼 목가적이었다. 그 길 끝에서 만난 호숫가에는 장난감처럼 예쁜 집 서너 채가 푸른 숲을 뒤로하고 파란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집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 싸여 사는 사람에게서는 시원한 박하향이나 서늘한 솔향이 날 것만 같다. 5월, 가을의 한가운데에 들어선 바릴로체는 숲, 하늘, 호수, 공기, 바람, 풀, 나무, 길, 산, 그 모든 것들이 자신들이 가진 최상의 빛깔과 상태를 유지하며 절정의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다.
우리는 다시 센트로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캄파나리오 언덕으로 이동했다. 보폭이 짧은 제나와 함께 걸어서 언덕을 오르면 함께 간 일행에게 폐가 될까 봐 나와 제나는 케이블카를 탔고 함께 왔던 일행과 형주는 걸어서 올라갔다. 날씨가 조금 흐리긴 했지만 앞뒤에 나우엘 우아삐 호수로 둘러싸인 지형 덕분에 정상에 올라서니 섬 꼭대기에 서 있는 느낌이다. 호수가 워낙 넓고 깊어서 그 위로 솟아오른 섬들을 담고 있는 풍경은 우리네 한려해상 수도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서 형주와 제나를 케이블카에 태워 먼저 내려 보내고 나는 함께 온 일행과 걸어서 내려왔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져서 먼저 내려간 아이들이 비를 맞고 있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형주는 비에 젖은 제나에게 제 겉옷을 입혀주고는 나무 아래 참새 두 마리처럼 쪼그리고 앉아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엄마가 없으면 저렇게 스스로 진짜 오빠가 되는구나.’ 코끝이 찡하다.
비에 젖어 더 짙어진 가을 단풍 길을 버스로 달려 센트로의 숙소로 돌아왔다.
바다 같은 호수와 그림 같은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숙소 주방의 저녁은 여행자들이 요리하는 온갖 음식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북적이는 그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자리를 잡고 한국에서 가져온 마른미역과 동네 마트에서 사 온 마늘과 국적을 알 수 없는 간장을 넣어 미역국을 끓였다. 기껏해야 고기 굽는 냄새와 토마토 볶는 냄새뿐이었을 음식 냄새 사이로 미역국의 오묘한 냄새가 스며들자 한국인 여행자들이 우선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호기심이 발동한 다른 나라 여행자들이 뭔가 자신들의 요리와는 다른 차원의 냄새에 이끌려 와서는 미역국의 시커먼 비주얼을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 옆에서 요리하던 호스텔 관리인이 요리의 정체를 묻기에 바다풀이라고 알려주고 한 숟가락 떠서 맛을 보여줬더니 바다 향기가 난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바다향기라니, 바다풀로 만든 미역국을 먹으면서 그저 미역의 냄새라고 여겼을 뿐 여태껏 한 번도 그렇게 이름 붙여 본 적이 없는 미역에 대한 맛의 표현이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미역국을 먹을 때마다 미역국에서 바다향기가 난다던 그의 말이 떠올라 가만히 혼자 웃곤 했다.)
까만 미역국에 냄비에 지은 하얀 밥에 노란 계란 프라이, 그리고 빨간 튜브 고추장이 전부인 소박하지만 컬러풀한 저녁상이 차려졌다. 여행이 시작되고 3주가 지나는 동안 과일과 빵, 기껏해야 말린 누룽지를 끓여 누룽지 죽 정도의 간단히 아침을 만들어 먹었을 뿐이었는데, 제대로 요리해서 먹는 건 이번이 처음인 셈이다. 감격스러운 마음에 셋이서 물 컵을 부딪치며 건배했다.
“우리의 여행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