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산 마르띤 - 2015/05/10(일)
어제 함께 토요 미사를 다녀온 일행과 함께 산 마르띤에 다녀오기로 했다. 산 마르띤으로 가는 일행 두 사람과 바릴로체로 돌아올 한 명에 우리 셋, 이렇게 여섯 명이 승용차 한 대를 렌트해서 타고 가자니 좁고 불편했지만, 무엇보다 우리를 곤란하게 했던 것은 전달된 차량이 수동변속 차량이었다는 점이었다. 모두들 자동변속 차만 운전해 봤기 때문에 선뜻 운전을 하겠다고 나서지 못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예전에 아버지의 수동변속 차를 몇 번 운전해본 경험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처음 30분 동안 주차장에서 출발과 변속을 연습해보긴 했지만 신호등에 걸리거나 중간에 쉬느라고 멈췄다가 다시 출발할 때마다 시동을 자꾸 꺼뜨려서 계속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시내를 벗어나 한 시간 정도 달렸을까, 5시간 정도로 예상되는 길을 단축하겠다며 운전자가 갑자기 핸들을 국립공원으로 향하는 비포장도로 방향으로 돌렸다. 그때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SUV가 아닌 소형 세단으로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인지, 그 비포장도로가 그렇게 오래도록 이어질지.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무엇보다 우리를 불안하게 했던 것은 그 길이 산 마르띤으로 가는 지름길이 맞긴 한 건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몸은 괴롭고 마음은 불안했지만 그 길에 펼쳐진 자연경관은 그 모든 심신의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아름다웠다. 뚜렷한 사계절을 가진 우리네 산천의 가을이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을 가졌다고 한다면 이곳 바릴로체의 가을은 보다 광활하고 거칠지만 그 속에 소박한 아름다움을 숨기고 있었다.
험한 비포장도로를 두 시간 정도 달리고 나서야 부드러운 흙길이 나왔고 조금 지나서 거울처럼 산을 비추고 있는 고요한 호수가 나타났다. 우리 일행은 길옆에 차를 세우고 자갈돌이 가득한 호숫가로 내려가 따듯한 오후 햇살 속을 산책했다. 작은 돗자리라도 있었다면 깔고 누워서 일광욕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호수는 고요했고 햇살은 부드러웠다. 누가 먼저였을까, 우리 일행은 모두 물수제비 뜨기에 열을 올렸다. 한 번도 물수제비 뜨기에 성공하지 못했던 나와 형주는 일행 중 베테랑에게 비법을 전수받아 다섯 번 튕기기에 성공했고 제나는 예쁜 돌멩이 줍기 삼매경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산에 둘러싸인 호수는 데칼코마니처럼 가을로 물든 산을 그대로 비춰냈다. 그 속에 서 노니는 우리도 그대로 그림이 되는 듯하다.
바릴로체에서 출발한 지 네 시간 만에 산 마르띤 데 로스 안데스에 도착했다. 비포장 길에 엉덩이를 혹사당하는 희생을 한 끝에 한 시간 단축에 성공한 것이다. 산 그림자를 반쯤 드리운 라까르 호수 위에는 새하얀 돛단배 서너 척이 평화롭게 떠 있었고 깊은 산속에 파묻힌 마을은 조용하고 아늑했다.
일행과 함께 피자로 점심을 먹고 난 후 산 마르띤에 남는 일행들이 숙소를 찾는 동안 우리 셋은 동네를 산책했다. 워낙 작은 동네여서 돌아보는데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다른 일행을 기다리면서 공원에 앉아 팝콘을 먹고 있는데 산책 나온 동네 주민인 듯한 인디오 아주머니 한 분이 제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시더니 예쁘다고 볼을 쓰다듬어 주셨다. 학교에서 나온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 공원 옆을 지나가다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다가와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니까 신기하고 반가운 얼굴로 웃으며 저희들끼리 “꼬레아 델 수르”라는 말을 물어 날랐다. 귀여운 참새 떼 같다.
오는 길은 힘들었지만 깊은 산골에 온 덕분에 순박하고 다정한 사람들을 만났으니 충분히 고생한 가치가 있다.
산 마르띤에 남는 두 명의 일행과 작별인사를 하고 서둘러 바릴로체로 향했다. 산길이라 해가 일찍 떨어질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아름답다고 소문난 일곱 개의 호수를 볼 수 있기를 기대했었는데 호수 근처를 지날 쯤에는 사방이 벌써 어둠에 잠겨 있었다.
밤 10시가 다 돼서야 바릴로체에 도착했다. 하루 종일 운전하느라 고생했던 일행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서 호숫가의 근사한 식당(Familia Weiss)에서 저녁을 먹었다. 바릴로체에서 자란 사슴고기와 멧돼지 고기로 요리한 푸짐한 음식과 구수한 빵도 맛있었지만 이 집에서 만든 양조 맥주의 깊고 독특한 풍미는 지금껏 마셔본 맥주 중 단연 최고라 할 만큼 훌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