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바릴로체: 앙구스뜨라 - 2015/05/11(월)
숙소에서 눈에 익은 사람들이 배낭을 메고 하나 둘 다른 도시로 떠났다.
이제 추운 계절로 접어들고 있었고, 또 한 두 달 정도 계획을 잡고 여행 온 사람들에게는 한 곳에서 2일이나 3일 정도가 적당한 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목요일에 이곳에 도착한 우리는 이제 바릴로체에서 5일 차를 맞는다. 앞으로 여행하게 될 여행지가 어떤 모습일지 이곳보다 더 아름다운 곳을 만나서 더 오래 머물고 싶어 질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이 아름다운 곳에서 일주일을 보낼 것이다. 어쩌면 더 오래 머물지도.
63년 전 에르네스또 게바라(이후 혁명가의 길로 들어서면서 이름을 체 게바라로 바꿨다.)와 그의 친구 알베르또 그라나도는 낡은 오토바이 포데로사를 타고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출발해 8개월 동안 칠레를 거쳐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미국의 마이애미를 돌아 다시 아르헨티나로 오는 여행을 했고 그들의 모험담은 책과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 책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초등학생이었던 형주에게 다소 어려운 책이었을 텐데, 잠자리에서 읽어주면 눈을 반짝이며 그들의 모험담에 빠져들곤 했다. 그 시절의 기억이 우리를 이 길 위로 데리고 온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어쨌든 우리는 그들보다 조금 더 위의 브라질에서 시작해 그들의 여행경로와 같은 방향으로 여행하고 있다. 산 마르띤을 지나 앙구스뜨라를 거쳐 바릴로체로 왔던 그들의 발길을 좇아 어제 산 마르띤에 다녀왔으니, 오늘은 그들이 오토바이 타이어를 고치기 위해 들렀었던 작은 호수마을 앙구스뚜라에 다녀올까 한다.
버스를 타고 나우엘 우아삐 호수를 따라 북쪽으로 한 시간을 달려 작은 마을인 앙고스뚜라에 도착했다. 작은 상점과 식당이 늘어선 마을에는 마땅히 할 일도 볼 것도 없어 보였다. 안내소에 들러 다녀올만한 곳을 추천해 달라고 하니까 호수가 여러 개 있으나 서로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모든 호수를 다 둘러보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릴 거라면서 그중 가장 가깝고 가장 아름다운 곳을 추천해줬다.
우리를 태운 시내버스의 운전기사는 정류장마다 올라타는 동네 주민들과 일일이 안부를 묻고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렇게 정겨운 동네 버스를 타고 30분을 달려 그 버스의 종착지인 작은 호수에 도착했다.(호수 이름을 적어둔 기록을 페루 리마에서 도난당하는 바람에 호수 이름을 확인할 길이 없어서 작은 호수라고 부른다.)
바릴로체 여행 첫날 갔던 샤오샤오 시립공원에서의 장대한 풍광과 달리 작은 호수가 있는 이곳의 풍경은 아늑하고 따듯했다. 버스 종점에서 호수로 이어진 노란 낙엽으로 뒤덮인 흙길과, 그 길 바로 옆 호숫가에 놓인 낡은 나무판자로 만든 작은 나루터, 그 근처에 매인 작은 배, 햇살에 투명하게 빛나는 초록빛 호수, 그 호수 위를 떠다니는 오리와 새들, 작은 호수 건너편으로 보이는 단풍으로 물든 가을 산, 호숫가에 그림처럼 늘어선 별장들, 그 앞의 모래톱 위에 가벼운 발 도장을 찍으며 날 듯 종종 거리며 노니는 작은 새들, 모래톱 위로 배어 나와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작은 물줄기들... 눈 닿는 모든 것이 보석처럼 빛났다.
바릴로체로 돌아가는 버스 시간을 감안한다면 이곳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한 시간이다. 이 완벽한 공간에서 뭘 하며 한 시간을 보내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고민하다가 우리는 햇살이 내리쬐는 호숫가 나루터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지상에 이 보다 더 아름다운 가을이 존재할 수 있을까. 눈을 감고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가을 햇살에 내맡기고 누웠다가 설핏 잠이 들었나 보다. 눈을 떠 보니 돌아가는 버스를 타러 갈 시간이 되어 있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