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바릴로체: 호수 위의 섬 투어 -2015/05/12(화)
계속 날씨가 좋지 않았다.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여행자들을 위해 숙소 관리인이 바나나 파운드케이크를 구워 나눠주었다. 바다 같은 호수가 보이는 라운지에서 먹는 갓 구운 빵 맛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이러니 1004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늦은 아침 겸 이른 점심을 만들어 먹고 나우엘 우아삐 호수에 있는 섬 투어를 위해 빠뉴엘로 항구로 향했다. 빠뉴엘로 항구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국립공원 입구에서 우리는 섬 투어를 할지 말지를 두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국립공원 입장료도 비싼 데다가(1인당 125페소: 한화로 18,750원) 배 삯도 예상보다 훨씬 비쌌기 때문이다.(1인당 520페소: 한화로 78,000원) 1인당 거의 10만 원의 돈을 들여서 들어갈만한 가치가 있는 곳일까. 10만 원이면 하루 방값의 두 배에 달하는 비용인데 형주와 나 두 사람의 입장료면 4일 치 방값을 이 투어에 써야 하는 셈이다. (그나마 다행히 제나는 무료입장이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10만 원의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의 판단은 다녀와서 해도 늦지 않을 테니.
항구에서 출발한 배는 푸른 호수 위로 이어진 눈 덮인 안데스 산맥을 배경으로 한 시간을 달려 아라쟈네스(Arrayanes) 숲이 있는 께뜨리우에 반도(Quetrihue Peninsula)에 도착했다. 아라쟈네스는 은매화나무로 지구 상에서 이곳에만 존재하는 종이라고 한다. 우리가 운이 좋았던지 지금은 은매화꽃이 피었다가 지는 시기라서 작고 하얀 앙증맞은 꽃이 메마른 듯 보이는 나무줄기에 피어난 모습과 바닥에 하얗게 떨어진 꽃잎을 볼 수 있었다. 계피나무처럼 밝은 황토색 나무줄기를 가진 이 독특한 나무는 관목인데 특이하게도 일반적인 나무처럼 키가 크고 일반적인 관목과 달리 잎사귀도 그리 풍성하지 않다. 디즈니의 만화영화 제작자가 이곳을 다녀간 후 영감을 받아 숲 속 배경이 유난히 아름다운 ‘아기 사슴 밤비’를 만들었다는 설명을 듣고 나니, 숲이 더 신비롭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께뜨리우에 반도에서 40여분 배를 타고 달려 도착한 곳은 빅토리아 섬(Isla Victoria)이다. 선착장에 내려 20분 정도 걸어가자 수령이 100년은 훨씬 넘었을 나무들이 길의 양옆에 늘어서서 그 무성한 가지로 하늘을 가려 나무터널을 만들고 있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흐린 날씨 때문이었을까, 그 숲길 어딘가에 숲의 정령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묵직한 신성함이 느껴졌다.
그 길 끝에는 나무 덤불로 만든 작은 터널식 문이 있었는데, 그곳을 지나면 마치 메리 레녹스와 친구들이 뛰어놀고 있을 비밀의 화원으로 통하거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등장하는 토끼(Pink eyes)가 외투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보며 서둘러 걸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런 상상과 달리 그 나무 터널 문은 키다리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반듯하고 촘촘하게 자라고 있는 숲으로 이어져 있었다.
옅은 오렌지 빛으로 말라서 떨어진 침엽수 잎들로 폭신하게 덮인 그 길에서 나뭇가지를 주워 지팡이로 삼으면서 사이좋게 놀던 아이들이 갑자기 서로 더 좋은 지팡이를 갖겠다며 티격태격 싸우기 시작하자, 어디선가 신비로운 눈을 가진 회색 고양이가 아이들 앞에 나타나 아이들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그 고양이의 출현으로 아이들은 지팡이 따위는 잊고 금세 그 사랑스러운 생명체에게 정신이 팔려 애정을 쏟았고, 숲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고요한 숲을 깨운 남매를 진정시키기 위해 숲의 정령이 고양이로 현신하기라도 한 것이었을까.
오후 내내 배를 타고 호수에 면한 섬과 반도가 키워낸 숲 속을 산책하며 보낸 시간 동안 우리는 신비로운 동화의 세계로 여행을 다녀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싼 입장료와 배 삯이 아까워서 포기했다면 누리지 못했을 소중한 시간이었음에는 분명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게 비싼 건 사실이다. 부디 그 돈이 이 아름다운 자연을 지키는데 적절히 사용되길. 그렇다면 우리의 이 억울한 마음도 조금은 위로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