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가 쭈쭈바 뽕따 색깔하고 비슷해."

아르헨티나, 엘 깔라파떼: 뻬리노 모레노 빙하- 2015/05/16(토)

by 민경화

형주는 어제 함께 왔던 일행들과 새벽같이 빙하 트레킹을 떠났다.

너무 어려서 트레킹에 못가는 제나와 나는 아침에 터미널에서 버스(Cal-Tur)를 타고 빙하 국립공원(Parque Nacional Los Glaciares)에 다녀오기로 했다. 비가 온다고 수만 년 세월 동안 만들어진 빙하가 녹아내리는 건 아니겠지만 하필이면 우리가 빙하를 보러 가는 날에 비가 왔다.

비 오는 아침 8시, 아직도 어두운 길을 걸어 제나 손을 잡고 터미널로 향하는데 터미널로 올라가는 길이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하루에 단 두 번 출발하는 버스의 출발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길은 못 찾겠고, 다급해진 나는 그 길에 유일하게 불이 켜진 건물로 들어가서 건물을 청소하고 있는 인디오 청년에게 터미널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는 에스파뇰을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길로 나와 손가락으로 방향과 블록 수를 알려주었다. 그의 안내에 따라 길을 제대로 찾아 안도한 나는 고마운 마음에 그 청년이 있던 건물 쪽으로 눈을 돌렸는데 놀랍게도 그 청년이 비를 맞으며 우리가 제대로 길을 찾아 들어가는지 보기 위해 계속 그 길에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됐다고, 고맙다고 손을 흔들어 주자 그도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화답하고는 그제야 다시 건물로 들어갔다. 훈훈해진 마음을 안고 가파른 계단을 힘겹게 올라 터미널에 도착하니 출발하려고 시동을 걸고 밴이 있었고,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그 차를 잡아탈 수 있었다.

우리를 태운 밴은 빗길을 뚫고 굽이굽이 산길을 달렸다. 이 산속 어디에 빙하가 있다는 것일까. 밴에 탄 일행 모두 빙하가 나타나기만 기다리며 창밖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앞좌석 쪽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윽고 산 그 안쪽에서 새하얀 빙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밴은 점점 빙하 가까이로 다가가서는 뻬리또 모레노 빙하(Glaciar Perito Moreno) 전망대로 가는 산책로가 시작되는 길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빙하.

TV 다큐멘터리나 과학 잡지에서나 볼 수 있었던 낯설고 차가운 이름. 그 빙하 앞에 제나와 내가 나란히 섰다.

지금쯤 형주는 저 빙하 위를 걷고 만지고 저 빙하가 녹은 물을 마셔보고 있겠지. 우리가 지구를 반 바퀴 넘게 대각선으로 왔다는 사실이 이제야 실감 난다.

우리 앞에 펼쳐진 뻬리노 모레노 빙하는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로스 글라시아레스 국립공원 안에 있는 50겨 개의 빙하 중 하나로 길이 14 km, 높이 50~55m, 폭이 4km인 거대한 얼음판이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오늘 같은 날씨에도 차갑고 선명한 에메랄드빛으로 빛을 발하고 있으니 해가 쨍쨍한 날에는 보석보다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우리는 빙하를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전망대에서 다시 밴을 타고 선착장으로 내려가 배에 올랐다. 빙하를 담고 있는 호수는 불투명해서 수면 안쪽이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빙하가 호수 물을 슬러시 상태로 얼린 탓일 것이다. 배가 빙하 가까이로 다가가자 빙하의 단면은 거대한 빙벽으로 우리 앞에 다가섰다. 그 빙하를 색으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막상 내가 알고 있는 하늘색 계열의 색상 이름이 얼마 되지 않아서 저 신비로운 빙하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퍼졌다.

“제나야, 저 빙하랑 제일 비슷한 색이 뭐가 있을까?”

“쭈쭈바 뽕따 색깔하고 비슷해.”

간결하고도 명쾌한 답이다. 정말로 그랬다. 뽕따를 만든 사람들이 빙하를 보고 나서 빙하에 가까운 색으로 만들 의도를 가지고 만들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앞으로도 답을 잘 못 찾겠다 싶으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해결하려고 혼자 속 끓이지 말고 아이들에게 물어봐야겠다. 아이들은 언제나 간단히 정곡을 찌르고 쉽게 명징한 답을 찾으니까.

이따금 장총이 발사되는 듯 무거운 총소리가 쩌렁쩌렁하게 하늘에 울렸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궁금했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빙하의 가장자리가 녹아 깨지면서 호수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였다. 저렇게 깨져 내리다가는 이 거대한 빙하도 얼마 못 가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괜히, 여기 살고 있지도 않는 북극곰이 녹아내린 얼음 조각 위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인류의 한 구성원으로서 지구의 환경 파괴에 한몫을 담당하는 나 스스로에 대한 죄의식에 사로잡혔다. 총소리처럼 울리는 빙하 조각 깨지는 소리가 나와 인류를 향해 쏘는 총소리인 것만 같다.


99170F3359F602AB2CD9E1 밴에서 내려 탐방로로 들어서기 전 빙하. 그 크가가 육안으로는 도저히 가늠되지 않는다.
993BEC3359F602AE19EBB4 탐방로 측면으로 보이는 빙하
9909813359F602B11CDFEE 탐방로의 끝,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이는 빙하
993C1E3359F602B319D69E 빙하 맞은편으로 보이는 설산
996D763359F602B628ED39 배를 타고 빙하에 접근 중
99D4F63359F602B920C22F 배 바로 옆으로 떠 다니는 유빙
9913C63359F602BB2C340C 배에서 보이는 빙하와 유빙


99F43B3359F602BE10E7CF 배에서 보이는 설산과 빙하
9925B03359F602C004A457 배로 빙하 탐사 중인 모녀
9961723359F602C31A359A 선착장에서 보이는 빙하 호수


다시 전망대로 돌아와 빙하에 가장 가까운 곳까지 걸어서 내려가 빙하를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안개비가 계속 내려서 살갗이 어는 듯 날씨가 차가웠다. 아쉽지만 이제 돌아가야 한다.

시내로 돌아와 저녁거리를 사들고 숙소에 들어서니 빙하 트레킹을 갔던 형주와 일행은 먼저 돌아와 있었다. 엄마 없는 하루가 어땠냐고 물어보니 녀석의 얼굴에 벅찬 감동의 웃음이 번졌다. 그 마음이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아서 말없이 아들을 안아주었다.


9931E63359F6049F18DED0 전망대의 반대쪽측면에서 본 빙하
99CEBE3359F604A22D0FC8 빙하 탐방로
996D233359F606630A0094 빙하 트레킹을 준비하는 사람들
몸을 녹이기 위해 준비한 위스키와 초콜릿



996DD63359F606640A3811 빙하 위에서 본 빙하 1
99D8333359F606641C376A 빙하 위에서 본 빙하 2
99F8123359F606651A4B47 빙하 트레킹 출발 대기 중
9994AD3359F60665321D6D 빙하수
빙하 트레킹 출발



빙하 위에 선 소년


99B4BE3359F606661C9D64 빙하 위에서 본 빙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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